10여년째 시민권자이면서도 그는 투표를 한 적이 별로 없다. 시간도 관심도 없고, 이슈들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아서다. 유권자 등록은 했지만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니다. 후보의 공약이나 발의안의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데나 찍으면 이 사회에 전혀 보탬이 될 것 같지않아 차라리 기권한다고 했다. 50대 한인인 그가 이번엔 꼭 투표를 하겠다고 한다. 피부에 와 닿는 ‘한마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필 앤젤리데스에게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앤젤리데스의 공약 중 캘그랜트 수혜자의 연소득 상한선을 올리겠다는 구절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캘그랜트는 주정부의 저소득 및 중산층 학생을 위한 대학재정보조 프로그램이고 그의 두 자녀는 대학과 하이스쿨에 다닌다. 현재 캘그랜트를 받으려면 4인가족의 연소득이 7만2,300달러 이하라야 한다. 그의 소득은 이보다 좀 높지만 보조 없이 두 아이의 대학등록금을 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충분히 가난하지 못해’ 빚더미 위에 앉아야하는 중산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모처럼의 한 표는 별 효과를 못 볼 듯하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다. 지지도 50% 대 33%로 공화당 후보인 아놀드 슈워제네거 현 주지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민주당 지도부까지 주지사 직은 벌써 포기한 듯 그보다는 슈워제네거 압승 예상 때문에 민주당 유권자들이 아예 기권하여 다른 민주후보들에게 영향을 줄까봐 우려하는 기색이다.
1,600만 캘리포니아 유권자 중 공화당은 34%에 불과하다. 민주당은 43%이고 23%의 무소속도 진보색채가 강하다. 그런데 공화 후보가 훨씬 앞서 있다. 민주당내 반란표가 많다는 뜻이다. 민주당 10명중 4명이 슈워제네거를 지지한다. 왜 그런가. 골수 민주당인 한 가톨릭 신부가 이렇게 대답했다.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사실 공화당 보다는 민주당 같아 보이니까요”
오래되지도 않았다. 슈워제네거는 선명한 공화당이었다.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와 사사건건 대결했고 민주당 지지기반인 노조와는 필사적인 싸움을 강행했다. 그 치열한 세력전쟁은 작년11월의 특별선거로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슈워제네거는 자신이 지지한 주민발의안이 모두 부결되면서 참패 당했다. 그게 불과 1년전이다.
그의 지지도는 부시 못지않게 폭락했다. 그런데 지금은 20% 포인트가 올라 60%대를 바라본다. 그 짧은 기간에 확실하게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비결은 한마디로 압축된다. 초당적 합의다.
요즘 미 정가에서 가장 호감을 얻는 화두가 바로 ‘초당적 합의’다. 그만큼 당파적 대치가 심하다. 이념 양극화를 부추겨 당선된 부시 집권이후 미국에선 양당합의의 자세가 실종되면서 연방과 주 뿐 아니라 로컬 정계에서까지 당쟁이 민생을 앞설 지경이다. 유권자들의 염증이 폭발직전인데도 기성 정치가들은 자신의 표밭 눈치를 살피느라 주저하고 있을 때 서슴없이 이 화두를 끌어안은 사람이 ‘아웃사이더’ 슈워제네거다.
당파적인 공화당 정치가에서 민주당과 손잡고 일하는 주지사로 변신한 것이다. 어정쩡한 무늬 바꾸기가 아니라 철저한 탈바꿈을 시도했다. 첫 2년 동안 전쟁을 치르던 민주당의 어젠다를 대부분 끌어안았다. 부시가 반대하는 지구온난화 방지 법안에 서명하며 인기 없는 부시와의 거리두기도 확실히 해두었고 당쟁심한 연방의회가 실패한 최저임금인상안도 마무리 했으며 저소득층을 위한 처방약 할인법안에도 서명했다. 민주당 후보의 공약이어야 할 이슈를 공화당 후보가 이미 다 실현시켜 버렸다. 앤젤리데스에겐 남은 게 별로 없어 보일 정도다. 중도에서 강경보수로, 다시 중도로 필요에 따라 변신을 거듭해온 그의 신뢰도를 겨냥한 앤젤리데스의 공격도 ‘아놀드의 스타파워’에 가려서인지 빛을 못보고 있다.
오히려 공화당 지도층은 슈워제네거의 성공변신을 2008년 대선후보 전략의 본보기로 쓰려고 한다. 상당히 오랜 기간 민주당 표밭으로 포기했던 선거인단 55석의 캘리포니아주를 다시 탐내기 시작한 것이다. 존 매케인이나 루디 줄리아니 같은 중도파 후보라면 슈워제네거 처럼 캘리포니아에서도 싸워볼만 하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극우보수에 등을 돌렸어도 공화당 내에서 슈워제네거의 위치는 상처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작년 9월 슈워제네거의 재선출마 발표를 듣고 쓴 칼럼에서 나는 ‘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모를까, 4년이나 더 극우 보수인사를 우리들의 주지사로 갖고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그가 크게 달라져 버렸다. 앞장 서 화합무드를 조성하며 초당적 합의로 민생이슈를 착착 해결해주고 있다. 선거는 이제 열흘 남짓, 그때까지 실용적인 중도파 주지사 슈워제네거의 재선을 반대할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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