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혈액검사를 위해 아침 일찍 병원을 갔는데 대기실에서 필자 바로 앞에 7~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빠 손을 꼭 쥐고 서 있었다. 아빠는 청진기를 목에 두르고 있는 차림새로 보아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인 듯했다. 팔에 고무줄을 감고 의자에 앉은 아이가 “I am scared.” 말하자 아빠가 “I know.” 했다. 필자 옆에 앉아서 혈액을 4대롱 뽑으면서 그 아이의 눈망울에서 금방 함지박 만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사바늘이 팔을 찌르자 “It hurts.” 딸의 말에 아빠는 “It will be over soon.” 다른 손을 꼭 쥐면서 말했다. 대롱을 갈아 끼울 때 “It’s really hurting me.” 아이가 말하자 아빠는 “Just two more.” 했다. 4대롱을 다 뽑고 걸어나오면서 아이가 아빠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데 아빠는 “Let’s go eat some breakfast.” 하면서 아이를 데리고 총총히 사라졌다. 필자는 그 아빠를 멈추어 세워서 “의사 선생! 아이 기분 좀 물어보아 주시오!” 이렇게 소리쳐 주고 아이의 기분을 물어보아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의사 아빠로서 아이가 힘들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청진기를 목에 두르고도 함께 와서 아이 손을 꼭 붙들고 곁에 서서 지켜보아 주고 그리고 배고플 것을 생각해서 아침 먹으러 갈 예비도 해두고 온 사려 깊은 아빠였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가 아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잘못 계산된 준비물들이다. 아이는 순간 순간의 불안함과 다 끝났을 때의 스스로도 대견한 기분을 아빠에게 전달하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부모가 자녀의 기분을 반영해 주는 대화는 이렇게 의과대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려운 기술이다. 그러나 자녀에 기분을 말할 기회를 마련해 주고 그 기분에 귀 기울여주는 일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모만이 해 줄 수 있다.
필자에게 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을 하나 내려놓고 거울 속에 뭐가 비치느냐고 물어보면 아이나 부모나 모두 “Me.”라고 말한다. 그러나 “me”가 아니라 “reflection of me”라고 말해준 다음 부모가 거울이 되어서 자녀의 기분과 생각을 반영해 주는 대화법을 연습하게 한다. 아이가 무섭고 많이 아프다고 할 때 “금방 끝나게 돼” “2대롱만 더 뽑으면 돼” 하는 말은 아빠의 조바심을 나타내는 말로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아이의 기분에 거울이 되어주려면 “나도 네 기분 안다”가 아니라 “그래. 많이 무섭지 그지?”해서 아이의 생각, 기분을 비춰주어야 한다. 마치고 나오면서 아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에게 아침 먹으러 가자는 말은 당연히 먹는 아침을 피 뽑은 대가로 사주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아이는 아빠가 “많이 힘들었지? 어땠는지 말해 줄래?” “You were hurting a lot, huh? Can you tell me about it?”이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나는 내 모습을 알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불안하고, 창피하고, 슬프고, 화가 나서 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내 기분을 비춰주는 거울이 없으면 감정의 모습이 파악되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할 때 자신의 감정을 일상적인 대화로 처리하지 못한다. 감정의 모습을 알 길이 없으므로 말이다.
그래서 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항상 비생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 의사 아빠처럼 계산, 논리적 판단의 좌반구 뇌는 학교 공부로 고도로 발달하지만 정서 능력의 우반구 뇌는 내 기분의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줄 때 발달한다. 기분을 비춰주는 대화 기술을 익혀 부모, 자녀 모두 대뇌의 균형 잡힌 사용과 발전이 너무도 필요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분을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이 공부도 잘 하고 부모 사랑도 잘 한다는 연구 결과가 산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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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손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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