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청하지는 못 하옵고 간절하게 소원하는 바를 전하옵니다.
그 동안 자기 보호에만 스스로 급급하여 어떤 모순에도 분노하거나 슬퍼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낙천주의 내지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있었음을 실토하고 통회합니다.
오늘날 나라가 이지경인데 나 홀로 안전하고 배부르면 된다는 생각은 분명한 죄악이며 사람으로서는 차마 그리할 수 없으련만 주변이 온통 그러고들 있다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나마저 그저 그렇게 살아오고 말았습니다.
나 하나로 무엇이 달라질 것이며 나 하나로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며 자포자기의 비열함을 서슴없이 취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사실은 분노를 삭이며, 애달파 하며, 포기하지 않으며 살아 왔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책으로 위와 같이 말합니다>
도라지꽃에 이어 봉선화도 마악 이울어가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실록의 나뭇잎들이 서서히 붉어가고 있어 풍악산이 한층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봉선화가 다 이울고 단풍이 지기 전에 무언가 좋은 소식으로 답답한 속이 시원하게 뚫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간원(懇願)합니다.
작금, 숨통 조이는 저들의 작태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변의 혹자는 분노하고 더러는 동정을 하기도 합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제재를 가하고 그로 그들의 숨통을 조여 쓰러지게 하거나 최소한 다시는 극악한 행위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도 하고, 그럴수록 달래고 얼러 무모한 도발을 안 하도록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얼핏 그럴 듯 합니다. 숨통을 조이다 보면 버릇을 고치기 전에 이판사판 무언가를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불안하기도 합니다. 어쩌다 총 든 강도가 돈을 요구하고 나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돈궤만 내주면 될 듯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어제도 왔었고 그제도 왔었으며, 내일도 또 모래도 올 것이 분명하여 아무 것도 모아놓을 겨를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을 긁어다가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기 위한 미사일과 핵무기를 만들고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데 쏟아 붓고 있습니다, 마땅한 응징을 해야 한다는데 우리가 돈궤만 내준다고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을 마을마다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논두렁 밭두렁에 땀 밴 적삼을 풀어제끼고 앉아 새참을 먹고, 둥글게 감은 새끼줄 뭉치로 축구를 하며 신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그곳으로부터 들려오기를 기다려 온지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듣기 좋은 글 읽는 소리도 아니고, 아이 우는 소리도 아니며, 다듬이질 소리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 죽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한숨조차 마음놓고 쉴 수 없는 백성의 처절한 비명만 들려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저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벼르고 벼른 이번의 도발은 만행의 수준이 아닙니다. 도끼 만행도 아니고, 아웅산 폭파 만행도 아니며 KAL기 폭파 만행도 아닙니다.
도발하지 않는 행위 일체를 화해라며, 한라산에서의 통일 봉화가 통일로 가는 길이고 국제 운동대회에 함께든 한반도기가 평화의 길이라며 우리는 그 동안 많이도 설레어 왔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석연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저 입 다물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왔습니다. 특별한 대안이 없을 바에야 좋다고 하는 분위기에 휩쓸리면 되는 일이니까요. 사실 옛날 같으면 미간을 펴고, 미소를 띄우며 손잡고 흔드는 일조차 불가한 일이었으니 이 일만으로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인정해야 되겠지요, 허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표리가 부동했음을 또한 부정할 수 없지요.
변해야 합니다. 그들이 백성 알기를 하늘처럼까지는 아닐지라도 평범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평정을 찾으면 비로소 만국이 대화를 하고 교역을 할 것이며 우리는 어깨동무로 백두산에 올라 중국의 음험한 수작과 현해탄 너머 교활한 일본과의 대처문제도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의 통일 논의는 건전한 우리의 대계가 될 것입니다.
한바탕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꿈이라도 좋습니다, 상상만으로도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데,... 감히 청하지는 못 하옵고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만 전하옵니다.
이문형 <워싱턴 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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