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진과 독일맥주 뒷풀이‘축제 속의 축제’
기나긴 오페라 공연이 끝나면 우리 모두에게 기다리고 있는 저녁파티가 있다. 바그너 소사이어티는 항상 주 배역진을 초대해 독일맥주의 진미를 음미했다. 특히 쿠른바크(Kulnbach)의 맥주는 독하여 땀을 몹시 흘린 사람에게는 제 맛이 난다. 친하게 지내는 브룬힐데역의 린다 왓슨이 놀라며 나를 기쁘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태생으로 뉴잉글랜드에서 공부했으나 현재 주로 유럽에서 공연을 많이 하고 있다. 현재 비엔나에 사는 앤은 20년 전에 LA에서 알게 된 친구였다. 새 친구인 센터역의 아드리엔느 더거와의 대화도 소중했다.
2006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공연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발퀴레’ 중 한 장면.
주 배역진을 초대한 바그너 소사이어티의 저녁 파티.
‘니벨룽의 반지: 발퀴레’에서 브룬힐데역을 맡은 린다 왓슨과 함께.
니체·쇤베르그·스트라우스
바그너에 많은 영향 받아
사상관련 부정적 시각 불구
국민음악가로 확고한 뿌리
공연관람이 없던 날, 세계 각처에서 모인 바그너 소사이어티 회원 142명과 바그너의 증손자로 올 바이로이트 축제를 주관한 볼프강 바그너, 이번에 공연된 모든 바그너 오페라의 주역 성악가들이 다함께 갈라 디너 모임에 참석했다. 출연 성악가인 린다 왓슨과 나는 한 자리에 앉았다.
마치 LA가 세계의 수도인 것처럼 남가주 소사이어티는 이 파티의 주역을 맡았다. 나는 볼프강 바그너 부부의 곁에서 리셉션을 맡았다. 한국에서 왔다 하여 나중에 한국회장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조크였지만-. 실제로 한국에도 바그너 소사이어티 지부가 있다. 이번에는 불참해 휴식시간 때 한국 바그너 소사이어티의 멤버라는 한 부부를 만났을 뿐이다.
‘링’은 연출팀, 오케스트라단, 합창단에 유저스, 조명, 의상, 청중이 하나로 조화를 이뤄 방대함을 자랑했다. 출연 성악가 워탄, 지그문트, 훈딩, 지그린데, 지그프리트, 발트라우테, 브룬힐데 등은 모두 영웅이었다. 그러나 실제 영웅은 ‘바그너‘였다.
니체는 어릴 때 바그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17세에 바그너의 ‘트리스단과 이졸데’에 매료돼 대사를 열심히 읽었다. 악보를 보며 피아노 연주하는 것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이 오페라는 무거우면서 아름다움을 겸비한 깊은 사랑 이야기이다. 처음 작품이 발표될 때는 인간으로서 노래할 수 없는 어려운 곡으로 간주했다.
바그너의 스위스 망명시절, 베센동크 부인 마틸드와의 연애편지를 주제로 작곡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아름답고 애절하고 감미롭다. 니체가 1868년 바그너를 만난 후 바이로이트의 반프리트도 몇 번 방문했다. 니체는 무신론자,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였다(바그너는 거의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지만). 바그너가 파르지팔의 작곡을 끝낸 후 악보가 니체에게 보내졌을 때 니체는 분노하여 악보를 찢고 그때부터 절교했다. 1872년 니체는 ‘비극의 탄생’이란 저서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을 논했다. 아폴로신과 디오니소스신과의 차이점을 논하며 바그너의 작품을 “디오니소스 정신의 부활”이라고 혹평했다. 니체는 바그너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했다고 분노했다.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는 바그너 오페라 가장 쉽게 비교되고, 안톤 브루크너, 구스타프 말러 등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그와 스트라우스도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1929년 ‘매직마운틴’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토마스 만은 “바그너의 예술은 의지와 지식을 겸비한 최고 수준의 노력으로 영원히 기념할 호기심을 자아냈다. 그 호기심은 천재의 수준에 달한다”고 했다.
바그너 사후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에 의해 13년간 트리스탄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등이 연출됐으나 공연은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중단되었다. 히틀러는 그의 통치기간 정기적으로 이 페스티벌에 참석했기 때문에 문화상인 게벨스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로 인해 바그너의 명예에 금이 가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 1951년까지 그다지 햇빛을 보지 못하던 페스티벌이 손자 볼프강과 비랜드가 탁월한 성악가를 초대하고 프로덕션의 스타일을 대중화하며 다시 대성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색스니 왕정에 대항하는 민주혁명가로서 독일식 오페라를 악극이라 이름지어 오페라의 혁신을 꾀한 국민음악가이지만, 반대로 그의 사상은 많은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바이로이트의 시가지나 독일 대도시의 거리도 그의 오페라 제목을 딴 거리 이름이 많듯이 독일 국민의 가슴에 깊이 파고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바이로이트는 화려한 왕정시대의 역사와 유적을 간직한 채 바그너와 그의 작품 일색으로 변하여 조그마한 음악도시로 변했으며, 이로 오늘 이 도시의 큰 재정수익을 얻고 있다. <참관기3회분은 21일자 문화마당>
이주헌<가주 바그너 소사이어티 회원 / 보헤미안 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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