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다호 주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 ‘샌드포인트’에 다녀왔다. 여러해 동안 친형제처럼 지냈던 잭과 브랜다가 처음 그곳으로 생활터전을 옮겨야겠다고 했을 때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어휴, 멀리도 가는구나. 그들이 떠난 후에 이따금씩 아이다호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왜, 감자 캐러 갈려고?” 하며 웃어 넘겼다. 정녕 감자를 캐러 간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류머티스성 관절염을 앓으며 합병증으로 고생해 온 브랜다가 몇 차례 보내온 사진 속에서는 한결 젊어지고 생기가 돌았다. 시아버지와 남편, 두 남자가 일 년 남짓 동안 짓고 있는 새 집도 완성되어 가니 꼭 한번 들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보금자리에 우리 부부를 위한 방도 만들고 있다나? 모든 것이 궁금하고 또 그들이 그리웠다.
베이커스필드를 지나 ‘나무의 도시’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던 새크라멘토를 지나고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포틀랜드 못 미쳐 마운튼 오브 샤스타의 평화로운 마을을 서둘러 마음에 담고 또 출발. 사십 오도 각도로 일제히 팔을 흔들어 반기는 듯한 에버그린의 초록빛 물결을 헤치고 콜롬비아 강을 따라 달리노라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몸 속에서 초록액이 흘러나올 것 같다. 풍선처럼 날아오를 것 같다. 하늘에는 수제비 구름, 생선가시를 닮은 구름이 한가로이 노닐고 강에는 서늘한 바람에 힘입어 윈드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워싱턴 주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 스포케인을 통과해 한 시간 남짓 더 가니 드디어 샌드포인트가 우리를 반긴다. 순식간에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집들은 나무들 뒤로 숨어버리고 가로등도 없는 길에서 길을 잃었다. 휴대폰도 작동되지 않아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겨우 한토막 신호가 뜬다. 순간 잭과 연결이 되었다.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마중나와 있는 그를 따라 울퉁불퉁 흙 자갈길로 들어섰다. 창문으로 흘러 나오는 옅은 불빛이 정겨운 집 앞. 그들 부부의 임시 거처이자 우리 부부가 머무를 그의 아버지 집이다. 자동차와 함께 했던 이틀간의 여정이 끝나려던 그 때, 부엉이 한 마리가 삼나무 꼭대기에 내려 앉는다.
그 곳 여름 빛은 싱그럽고 짙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초원이요 숨이 턱 막히는 푸른빛이다. 하늘을 이고 병풍처럼 늘어선 시덜(cedar 삼나무), 애스펀(aspen 사시나무), 스프루스(spruce 가문비나무속 상록교목), 커튼우드(cottonwood 넓은 잎 양버들) 들은 눈이 아리도록 아름다웠다. 사시나무 잎들이 바람에 떠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햇살이 그 동그란 이파리들 속에서 물결치는 것을 보았는가? 나무와 바람이 만들어 내는 청량한 물소리에 귀를 씻는다. 머릿속은 아득해지고 감춰 두었던 그리움들이 덩달아 일렁인다. 누구라도 그 순간에는 시인이 된다.
사람들은 거기 삼나무를 닮았다. 얼핏보면 딱딱하고 따가울 것 같아도 막상 만져 보면 부드러운 깃털 같은 느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삼나무 잎줄기 똑 떼어서 책갈피로는 그만이라며 건넬 줄 아는 낭만도 지녔다. 스스로 소방관도 되고 사냥꾼도 되고 목수도 된단다. 부디 그곳에 가거들랑 무뚝뚝한 듯 하지만 순박하고 꾸밈없는 사람들과 가슴을 열어 친구가 되어보라.
대부분의 집들은 5~10에이커의 땅에 욕심 없이 아담하게 지어져 있다. 초원이라 불릴만한 마당에는 알파파씨를 뿌려 사슴들의 먹이를 제공하고 놀이터로도 활용된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국 TV드라마, ‘초원의 집’ 속 로라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 같고 ‘빨강머리 앤’처럼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펴며 나를 풀어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곳.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곳.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비껴선다고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리라.
샌드포인트를 떠올릴 때 그곳 호수의 매력을 빼놓을 수는 없다. 수 천년 세월의 흔적을 삼키고도 그토록 맑고 깊고 순한 낯빛으로 겸허한 호수. 그 앞에 홀로 서 보라.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간혹 멈춰 단속(斷續)된다” 고 누가 그랬던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망망대해같이 펼쳐진 호수. 침묵으로 응시하는 푸른 섬들. 드문드문 보이는 물빛 하늘빛 소박한 물곁의 집들. 태양이 붉은 탄식 내지르며 이 모든 것들로부터 비껴나려 할 때, 세상은 간데없고 생각이 사라지고 호흡도 멈춘다. 바람도 잠시 멈칫거린다. 눈치 없는 섬 하나가 내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 그곳으로 가보라. 사람이 풍경이 되고 풍경이 사람이 되는 그곳. 고갈된 육체와 정신을 설레임과 생기로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지가지 사연이나 상처들일랑은 물 속에 던져버린 듯 온 몸으로 생의 기쁨을 피워 올리는 사람들을 만나 보라. 전 날 떠올랐던 무지개를 얘기하며 눈을 반짝거릴 때 햇살 같은 희망이 함께 빛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서로 눈맞추고 속삭이고 어루만졌던 모든 것들이 가슴속에서 팔딱거린다. 더운 마음 온전히 나눌 수 있는 벗들이 있고 언제든 한 몸 누일 방 한 칸도 있으니 오늘도 생각은 아이다호 샌드포인트를 향해 달음질친다.
■수필가.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성영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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