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차대전 중인 194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회의에서는 대전이 끝나면 다시는 이와 같은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적인 평화기구를 만들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중국을 포함한 4개국 명의로 모스크바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해 모든 평화 애호국의 주권평등 원칙에 따른 세계적 국제기구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1945년 2월, 미·영·소 3개국 정상의 얄타회담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표결방식 등 구체적 사안이 합의되었고 두달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참가국 50개국 전체회의에서 두달간 헌장을 만든 후, 이 해 10월 24일 51개국의 가맹국으로 유엔이 정식 출범했다.
이렇게 탄생한 유엔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동등하게 한 표의 표결권을 주고 있지만 2차대전의 승전연합국이 주도했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 특권을 인정했다. 미국,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5개국은 유엔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 평화와 안전을 담당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거부권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유엔에서 미국의 위치는 확고했다. 유엔의 구상과 탄생 과정에서 미국이 중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유엔본부가 미국의 뉴욕에 자리잡고 있고 유엔의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미국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동서 냉전시대에 유엔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양대 세력의 대결장이었으나 그래도 미국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이와 같은 미국의 영향력은 신생 한국의 입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남한정부에 대한 유엔의 압도적 승인, 6.25 당시 소련대표의 불참이란 요행의 덕분이긴 했지만 유엔군의 파병 등은 미국의 후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때 미국이 곧 유엔, 즉 미국이 생각하면 유엔이 결정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주로 서구의 식민지에서 새로 독립한 나라들로 이루어진 비동맹 국가들이 무더기로 유엔에 들어오면서 유엔의 판도가 변화하여 강대국과 똑같이 한 표를 가진 작은 나라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어 냉전시대가 종식된 후 다극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웬만큼 인구가 많고 경제수준이 올라간 나라들은 상임이사국이 되겠다고 하고 미국이 세계 문제를 끌고 기려고 하는대로 회원국들이 따라와 주지를 않는다. 지난번 이라크전쟁 때만 해도 미국은 유엔의 깃발 아래 전쟁을 하려고 했으나 유엔이 따라오지 않아 결국 영국과 함께 명분이 약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총회는 미국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 성토장이 되고 있다고 한다. 부시대통령이 이란 등의 핵개발과 테러리즘을 비판하는 연설을 해도 미국에 반감을 가진 나라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반미동맹에 앞장서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유엔 연설에서 부시대통령을 ‘악마’‘거짓말쟁이’‘독재자’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미국이 세계의 인민을 착취하고 약탈하고 있다고 반미 선동을 했다.
이런 말을 한 차베스는 동키호테 같은 인물이라고 치더라도 그의 말이 다른 후진국 대표들에게 먹혀 들어가고 선진 서구 국가들이 미국의 입장을 변호하거나 동조해 주지 않는데 미국 외교의 문제가 있다.
한 마디로 유엔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미국 외교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외교를 이끌고 나갈 때는 유엔이 미국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런데 유엔이 생각대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미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왜 미국은 고립되고 있을까.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인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국제관계가 변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여 유엔 안보리에서 만장일치로 이스라엘 비난 결의안을 채택할 때 미국만이 반대표를 던지는 것처럼 미국이 다수 국가의 편이 아니라 소수 국가의 편에 서는 나라가 되었다.
국제관계가 변화하면 미국의 대응도 변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의 고립을 미국이 자초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기영 뉴욕 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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