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아무리 좋아도 그 속에 사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죠”. 전집 발간으로 그의 문학에 한 매듭을 지은 고원 시인이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상이 없는 글은 껍데기죠”
“나는 인간중시 평화주의”
최근 문학활동 60년 모은
‘고원 문학전집’5권 펴내
“모국문단에 소외감 있지만 한국보다 시야 넓어져 도움”
고원 시집 ‘춤추는 노을’을 폈다. 3년 전 나온 시인의 15번째 시집이다. 이 책에 실린 그의 시편들은 맑고 단아하다. 쓸쓸함 마저 청아하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그의 별들은 높고 깊은 곳에 있지만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듯 다정하다. 그 다정함 속에는 그러나 삶의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 예컨대 이런 시-.
‘사람이 / 마지막으로 잘 / 아주 잘 뽑히면 / 저렇게 별이 된다더라. / 뽑혀서 별 / 하나 되면 / 사람들을 또 / 또 / 만난다고 별이 / 오늘밤에 / 그러더라’ (별이 되면·1999년)
죽어서 별이 되면, 죽은 후 아주 잘 돼 별 하나로 뽑히면 당신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의 손을 떠난 시가 무엇이 될까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라면 이 시에서는 삶과 죽음의 기쁨, 혹은 슬픔이 느껴진다. 죽음도 꼭 피하려 할 것만은 아니다. 다시 별이 되어 밤하늘에 반짝반짝 떠오를 수 있다면-.
이런 별 이야기는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영동군 시골쯤이 배경이면 더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를 쓴 고원(80) 시인은 42년째 미국에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어떤 작품들은 미주 한인문학이 가 닿을 수 있는 높은 지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귀하다.
그는 한국서도 손꼽는 몇 안되는 미주문인 중 한 사람이다. 이민문단 뿐 아니라 남가주 문화예술계의 많지 않은 원로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20세 무렵에 냈다는 습작시집 ‘새움’을 문학활동의 기점으로 잡으면 시력이 환갑에 이른다. 그 세월 동안 그는 시인이면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학자로 살아왔다.
지금도 일주에 사흘간 라번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고원 시인은 미국과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비교문학 등을 가르치면서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도 앞장섰다. 예를 들어 지난 70년 그가 편·번역을 맡아 아이오와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Contemporary Korean Poetry’는 모처럼 한국 현대시를 제대로 미국사회에 소개한 책이어서 특히 한국내 문인들의 반향이 컸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 5권으로 된 ‘고원 문학전집’(고요아침 발간)을 펴냈다. 지난해부터 미주의 후배 문인들이 고원전집 간행위원회를 만들어 애써 왔던 이 일이 결실을 맺음으로써 그의 문학에는 큰 매듭 하나가 지어진 것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일 수도 있고, 글 따로 사람 따로 일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그 둘 중 시인에게는‘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나 싶다. 그는‘별이 되면’과 같은 일련의 시에서 받을 수 있는 인상처럼 맑고 단아한 시인으로 많은 후학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늘의 별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뜨거운 땡볕여름, 포터 랜치에 있는 시인의 자택을 찾아 이번 전집과 얽힌 이야기 등을 들었다.
-이번에 전집을 내셨군요.
“영어로 된 작품을 뺀, 시와 수상 등은 대부분 다 묶었어요. 너무 오래된 것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OO으로 표기하기도 했죠. 2권은 시집, 나머지 3권은 수상 등 산문집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살아온 생을 정리하고, 점검하는 기회가 됐어요. 미국에서 글쓰는 다른 분들에게도 자극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집의 많은 글은 미국에서 써졌습니다. 미국에서 한글로 글쓰기의 어려움은 어떤 것 인지요.
“우선 한국문단에서 소외감이 크지요. 아는 사람이 편집을 하지 않는 한 앤솔로지등을 만들 때 제외되고, 무시되죠. 전부 신인들이어서 요즘은 서울 가도 아는 문인도 적고-. 제 경우 그렇진 않지만 발표지면도 문제지요”
-그런 환경적인 것 외에 직접 창작에 미치는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영어식 감정표현과 한국식 감정표현이 헷갈릴 때가 있어요. 왜, 일상대화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한국말 보다 영어 단어가 더 편하고 효과적일 때 말이예요. 저는 시를 쓸 때 처음부터 한글로 쓸지, 영어로 쓸지를 구별해서 써요. 그게 해결책이 되죠. 두 언어를 비교하면 함축성은 영어가 강한 반면 비유는 한국어가 훨씬 풍부합니다. 어머니 세대, 시골로 갈수록 한국의 언어생활은 비유가 더 풍부하고 다양해요. 우리는 대단히 비유가 많은 민족이죠.”
-미국에 살면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공간적으로 큰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을 크게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죠. 창작을 할 때 너무 신변잡기나 민족에만 매달리지 말았으면 해요. 한국 문학의 문제는 너무 좁다는 것인데 좀 크게 봤으면 합니다”
-선생님의 요즘 시는 짧은 것 같습니다. 세어 봤더니 거의 15줄 이내더군요.
“10여 년 전부터 15줄 이내 시를 쓰고 있죠. 시를 쓰는데 왜 그리 말이 많나, 말 많으면 산문을 쓰면 되지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압축, 압축하면서 써나가고 있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단시주의자가 됐는데 앞으로도 짧아졌으면 졌지, 길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시는 초보일수록 자꾸 어려운 말, 관념적인 말로 씁니다. 쉽게 쓰기가 더 어렵고, 시간이 걸리죠. 젊었을 때는 나도 사상과 생각을 앞세우느라 한자어를 참 많이 썼지만 관념적인 한자어 대신 한국말만 가지고 시를 쓰니까 시가 더 구체적이 되고, 영상이 만들어 져요.”
-20년이상 운영하고 계신 ‘글마루’를 통해 많은 문인들이 나왔습니다. 글마루에서 듣고, 또 듣고 하면서 문학공부를 계속하는 문인도 있는 걸로 아는데-.
“이번 학기에도 20여분이 등록했어요. 다음주부터 공부를 시작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이제 격주에 한 번만 모이기로 했어요. 글마루에 오신 분들은 ‘글은 처음입니다’라고들 하시지만 다 거짓말이고, 글을 꽤 쓰던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하나같이 글쓰기의 기초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이야기하지요 ‘오늘부터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생각해라, 훈련소 가면 총 받기 전에 차렷, 경례부터 배우듯 문장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자’고 말이죠. 한국사람들이 제일 못하는 게 뭔 줄 아세요? 바로 한글로 글쓰기죠. 말은 따르륵 잘하지만 글을 못써요. 그건 미국사람도 마찬가지고요. 피아노의 대가도 스케일 연습부터 하듯 글을 쓸 때도 탄탄한 기초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제 전집을 나왔습니다. 바라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좋은 독자를 만나고 싶어요. 저를 시인으로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합니다. 전집 5권 중 3권은 사실 산문집 아닌가요. 글이 아무리 좋아도 그 속에 사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죠. 세상과 인간, 역사를 보는 눈이 바로 사상이고, 좋은 사상이 정리돼야 좋은 문학이 됩니다. 제 글이 그런 사상을 담아내길 원해요. 독자도 그걸 읽어 줬으면 하고요. 굳이 나의 사상을 말하라면 인간을 중시하는 인도주의고 평화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고원 시인은 포터 랜치의 집에서 화초와 조경을 배우며 그에 관한 글도 쓰고 있는 부인 고영아(전 LA중앙일보 편집위원)씨, 딸 윤주씨와 함께 산다. 결혼한 장남 형진씨는 샌디에고로 분가했다. 고영아씨는 남편에 대해 “천생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글마루 출신 제자 등이 자주 찾아오고, 강의도 많아 잦은 프리웨이 운전이 다소 신경 쓰인다고 했다.
시인이 뽑은 시 2편
꿈얘기
별이 하나 휘익
떨어져
바다에 빠졌다.
바닷물이 콸콸 치솟아
온 하늘에 출렁였다.
밤이 떠는 바람에
많은 별들이 출렁거렸다.
그 가운데 별 두 개에
사람이 하나
매달렸다. (2000년)
단풍
단풍나무 철들었네.
철이
단풍들었네.
세월 가서
겹겹으로 물든 시간이
더 익어 고운 이파리.
그 밑에 선 사람
어느 철에
단풍들건가. (2001년)
■고원 시인은 ▲1926년 생. 혜화전문 거쳐 동국대 졸업. 런던대학 퀸메리대 수학. 아이오와 대학 영문학(문예창작) 석사. 뉴욕대학(NYU) 비교문학 박사. 라번대·UC 리버사이드·칼스테이트 LA와 노스리지 등과 경기대·수도여사대·건국대 등에서 교수와 강사.
▲3인시집 <시간표 없는 정거장>등 시집 15권. 시조집 <새벽별>. 산문집 <갈밭에 떨어진 시간의 조각들>등 3권. 영시집
3권. 영한번역시집 <영미 여류시인선>등 2권. 한영번역시집 등 3권. 기타 학술저서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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