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살이다. 한창 꽃피는 나이에 병을 얻고, 아버지의 사촌뻘 되는 먼 친척집에서 신세지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암담하다. 사촌 고모는 지방도시의 이름난 정형외과 병원 원장 부인이셨다. 그 곳에서 2차례 수술을 받고 회복기를 보내면서 나는 땅콩 한 말 이상 씹으며 내 인생을 곰씹곤 했다. 참으로 많은 것을 한꺼번에 생각했다.
당시 머리맡에는 라디오가 한 대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면 ‘아침의 희망음악’인가 뭔가에서 흘러나오는 구슬픈 음률이 쏟아지는 눈발과 어우러져 마치 처량한 내 인생을 반영해 주는 듯 했다. 물론 독서라든가 다른 탈출 수단이 있었지만 어쩐지 자신의 비감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이 음악이라고 느껴졌다. 순간에 울렸다가 순간에 사라지는 그 청아한 메아리는 마치 영혼의 등불… 어떤 구원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먼…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상상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만 주어진 위로이자 보상인 것 같았다.
음악에 대한 사랑… 그 집착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마치 신(神)을 상실한 니체가 그 암담한 절망을 음악 속으로 탈출해 나갔던 것처럼… 음악은 비감한 영혼에 감사를 느끼게 할 만큼, 그 어떤 선물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 후 회복기를 지난 훨씬 뒤에도 책읽기보다는 음악에 열을 올리게 됐다. 사춘기의 지적 정보를 소설(문학) 등에서 취득했던 친구들과는 달리 음악으로만 계속 몰입해 갔던 것은, 지금에 와 생각하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영혼불멸을 부르짖으며 독배를 마신 것은 근대 서양 철학의 기초가 됐다. 희생 없는 진리란 허울뿐인 개살구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밀알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음악은 성질상 소멸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음이 귀에 전달되는 순간 공중 분해되는 그 처연함은 마치 불교의 다비식에 비교될 수 있을까…. 음악은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의 예술이다. 문학 역시 어떤 ‘희생’이라고나 할까 자기 소모 없이는 감동을 주기 힘들다. 재주나 문장의 비범함으로 승부하는 작품은 자칫 현학주의에 흐르고 만다. 투철한 희생적 작가 정신만이 독자와 문학을 연결시키는 통로라 할 것이다.
소설을 비로소 읽기 시작한 것은 미국와서 7년쯤 지난 뒤였다. 80년에 이민왔으니까 87년 정도였을까. 미국생활은 의외로 고독했다. 마치 언어를 상실하고 대화의 창구가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문학은 추상적인 음악과는 달리 실체적인 대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허구의 세계일 망정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음악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민생활의 고달픔을 잊게 하는 색다름이 있었다. 그 당시 읽었던 작품중 가장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 중국 루신(魯迅)의 작품들이었다. 말수 적고 간결한 문장은 마치 음악을 듣는 듯 했다. 자칫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착각할만큼 과장과 수식어가 없는 문장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루신은 20세기 초엽 중국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중국인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인 과도기에 그는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시대의 선각자였다. 이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동양권에서 루신이 명성을 얻고 세계적 작가의 대열에 낀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루신은 당대 불란서의 문호 로망 롤랑이 점찍은 작가였다. 루신의 간결한 문체가 음악소설 ‘장크리스토프’를 썼던 저자 로망 롤랑의 눈에 들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로망롤랑은 루신의 ‘아큐정전’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단한 작가로 평가받기는 쉬워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문장을 쓰기는 쉽지 않다.
‘고독자’, ‘아큐정전’, ‘광인 일기’등 루신의 대표작들은 애국정신과 불굴의 예술정신이 드러나 있다. 음악적이라고 생각하여 문학 작품중 유일하게 몇줄 기억하고 있는 루신의 ‘고독자’중에 나오는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정확한 옮김이 아니라 기억의 이미지를 더듬어 간다.) 신비… 나는 형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오. 존칭을 그저 빈 공백으로 남겨둘테니 형이 알아서 붙이구려. 형은 나에게 수없이 편지했건만 나는 단 한차례도 답장하지 못했오. 이유는 간단하오. 우표 살 돈조차 없었기 때문이요. 생각하건데 지난 기간은 무척이도 어려웠던 시기였소. 죽지 못해 살았을 뿐이요. 그나마 죽지 못해 살아있었던 것은 아직 해야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요. 그런데 이제는 그일 마저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소. 이제야 비로소 멸망한 것이요. 그렇게 살기를 원하던 시기에는 살지 못하고 이제 죽기를 바라는 시기에 다시 살게 되었소. 출세하게 된 것이요. 그래서 나는 그동안 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 몸소 실행하려고 하오. 그동안 경멸하던 것들을… 그동안 저주하던 모든 것들은 행동에 옮길 것이요. 형은 나를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렇지는 않소…(중략). 형은 기억할 것이요. 우리가 만났던 그 응접실…. 이제 그곳에도 사람이 들끓기 시작했오. 새로운 얼굴, 새로운 만남… 새로운 벼슬자리 운동, 마작판과 주먹질… 각혈이 있소. 새벽에 한참 각혈을 했더니 이제는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오. 형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요. 형도 역시 벼슬자리 운동 중이요. 필요하다면 한자리 마련해 줄 수도 있소. 형이 그동안 나에게 보내준 성의를 감사하오. 그러나 이제는 잊어주시오. 어차피 우리는 갈길이 다른 것이니까…) 마치 베토벤의 ‘운명’ 2악장 처럼 비감하게 느껴지는 편지의 주인공(연수로 기억함)은 몇 달 후 죽게 되는 데 이는 폐병으로 죽게되는 작가(루신) 자신의 심정이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단순히 문학에서 그치지 않고 무지몽매한 중국 민중을 계몽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일념… 루신의 글이야말로 단순한 글이 아니라 피토하 듯 써갔던 음악적 문장…, 애국적 심포니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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