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머리나 선글라스의 고개짓은 참을 만했다. 연사의 주장이 어떤 결론이나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맞춰 끄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구모자는 기준도 없이 흔들어 댔다. 연사가 말을 시작하기만 하면 머리방아를 찧는다.
노랑머리 보다는 선글라스가 더 심하지만, 선글라스에 비하면 야구모자의 까딱거림이 훨씬 더 방정맞았다. 노랑머리와 선글라스는 느리고 크게 끄덕이는 반면, 야구모자는 흡사 닭이 모이 쪼듯 모자 쓴 머리를 콕,콕,콕 까불어 댔다.
그건 마치 어려운 강의를 자기들만 이해한다는 몸짓인데, 때로 야멸차게 턱을 까불며 옆 사람을 힐긋거리기까지 할 때면 ‘저거 맞는 말인데 당신들 왜 가만히 있어’ 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강연회장이나 세미나에서 그런 사람을 주변에 둔다는 것은 딸기밭에서 뱀 만난 거와 마찬가지다.
노랑머리나 선글라스의 고개짓은 참을 만했다. 연사의 주장이 어떤 결론이나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맞춰 끄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구모자는 기준도 없이 흔들어 댔다. 연사가 말을 시작하기만 하면 머리방아를 찧는다. 어느 때는 아예 연사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야구모자의 뒤통수가 먼저 까딱까딱, 호들갑을 떨었다. 앞에 한 말이 맞다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뜻인지, 검정자켓에 팔장을 딱 껴붙인 야구모자는 조임끈 사이로 뽑아 낸 꽁지머리가 팔랑거리도록 뒤통수를 흔들어 댔다.
그런데 문제는 꽁지머리까지 흔들리는 야구모자가 바로 내 앞자리라는 데에 있었다. 퍼블릭도서관의 회의실에서 하는 강의였기 때문에 연단이 특별히 높지 않아서 푼수 없이 흔들어 대는 뒤통수, 찰랑거리는 꽁지머리를 비켜가며 연사의 모습을 훔쳐보자니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무슨 놈의 향수를 머리에도 뿌렸는지 고개짓에 따라 폴폴 풍겨 오는 화장품 냄새에 골치가 지끈거렸다.
더구나 내 코앞의 야구모자를 시작으로 맨 앞쪽 노랑머리까지 쪼로록 한 줄에 앉아 있어서 나는 꼼짝없이 각기 다른 세 여자의 머리 흔들림을 지켜봐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야구모자를 피하면 선글라스가 가로막고, 어찌어찌 선글라스까지 비키면 이번에는 노랑머리에 막혀버리기 일수였다. 두어 차래 허리를 세우고 목을 쑤욱 뽑아 그들의 머리 위로 연단을 바라보기도 했다. 허지만 그런 모습은 볼썽사납기도 하거니와 코앞으로 드러난 세 여자의 머리짓을 한 줄로 보게 되어 뒷골이 더욱 땡겼다.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실내를 한 바퀴 슬쩍 둘러보았다. 50여 개 쯤의 의자는 이미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고 서 있는 사람도 10여 명이 넘었다. 지금은 자리를 옮기기에 이미 시간이 늦어 버렸다. 본국에서 온 유명 여류 작가의 강의도 듣고 저자의 사인도 받을 겸해서 모처럼 밤나들이를 한 것 인데 앉고 보니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예정 시간 보다 30분이나 일찍 온 덕분에 괜찮은 자리를 잡았다며 느긋이 앉아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여자들의 집단 고개짓에 두 눈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일삼아 중앙 통로 건너편의 반대쪽까지 슬그머니 살펴보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앞의 여자들 말고는 머리 흔드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내 앞에 만 이런 여자들이 하나도 아닌 셋씩이나 앉아 있단 말인가. 나는 자리의 신을 원망하며 야구모자와 노랑머리와 선글라스의 흔들리는 머리통을 헤치고 다시 한번 연사의 얼굴 찾기를 시도했다. 오늘의 연사인 여류작가는 마침 중심 주제를 꺼내놓고 열변에 돌입해 있었다.
“여기 항아리가 있습니다. 먼저 큰 돌을 항아리 속에 넣었더니 몇 개 넣지 않아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항아리가 가득 찼지요?”
노랑머리와 선글라스는 확신을 가진 듯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야구모자도 턱에 묻은 떡고물을 털어내듯 탈탈탈 고개짓을 했다.
“네, 그러면 이 큰 돌로 가득 찬 항아리에 주먹만한 돌을 넣어 보겠습니다. 큰 돌 사이로 작은 돌을 채워 넣는 것입니다. 수 십 개의 작은 돌이 들어갑니다. 다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작은 돌이 들어 갈 자리가 없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지요? 맞나요?”
이번에도 노랑머리와 선글라스는 고개를 크게, 야구모자는 탈탈탈, 꽁지머리를 털었다. 몇몇 사람들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자, 그런데 이번에는 이 항아리에 모래를 넣습니다. 크고 작은 돌로 꽉 찬 것 같은 항아리에 한없이 모래가 들어갑니다. 한 자루의 모래가 다 들어갔어요. 항아리가 돌과 모래로 꽉 찼습니다. 그럼 이젠 정말 항아리에 빈자리가 없는 걸까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제야 말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흔들릴 듯 하던 노랑머리와 선글라스의 뒷머리가 약속이나 한 듯 까딱, 하며 멈추어 섰다. 습관적으로 흔들어 대다 보니 문득 어떤 함정에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더구나 노랑머리와 선글라스의 자리는 연단의 지근거리여서 연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 야구모자는 이제야 말로 항아리가 자기 용량을 모두 채운 것이 분명하다는 몸짓으로 끼었던 팔장까지 풀어 헤치며 까딱,까딱,까딱, 최고의 방정맞은 모습으로 뒤통수를 털어 댔다. 그러자 연사는 강의에 장단을 맞춰주어 고맙다는 미소를 야구모자에게 담뿍 보내며 오른쪽 약지 손가락을 세워 주의를 집중시켰다.
“네, 항아리가 진짜 가득 찼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물을 붓는 거예요! 보세요, 돌과 모래로 빈틈없이 꽉찬 항아리에 물이 두 주전자나 들어가는 것을. 자 여러분, 이제야 말로 항아리는 정말 가득 찬 것입니다!”
연사의 입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정말 그렇다는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더러는 박수를 치고 몇몇은 하하,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야구모자가 지금까지 도도하게 빼고 있던 머리를 숙이며 힘없이 어깨를 내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가 자신의 무지를 비웃는다고 생각 한 모양이었다. 기실 조금전 연사가 야구모자에게 미소를 보낼 때 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빼어 그녀의 방정맞게 까딱이는 머리를 훑고 지나 갔었다. 야구모자의 의기소침엔 상관없이 연사의 열강은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이 얘기의 요점은 우리의 마음 항아리에 큰 것부터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헌신, 용서 같은 큰 것을 먼저 넣고 나눔, 관용, 베품 등, 크기의 순서에 따라 마음에 저장 하라는 뜻입니다. 물질, 욕망, 애착 따위 하찮은 것들로 마음항아리를 먼저 채우면 사랑과 용서 같은 큰 돌이 들어 갈 수 없다 이 말이지요. 자, 누구 한 분, 나는 내 마음 항아리에 제일 먼저 이것을 채우고 싶다, 라고 말씀해 주실 분은 안계십니까?”
연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강당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때 놀랍게도 어깨를 웅크리고 있던 앞자리의 야구모자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야구모자는 조금 전의 부끄러움을 만회라도 하겠다는 듯 앙칼진 목소리를 또박, 쏟아 내었다.
“관용이요!”
야구모자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 동조하듯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닭 모이 먹듯 고개를 아래 위로 탈탈탈, 털어 대었다.
미주한국일보 소설 입상/미주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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