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과 ‘반항’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 두 낱말 모두 정도(正道)에서 다소 벗어난, 즉 보수 노선에서 벗어나 헤매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방황’은 수동적, ‘반항’은 능동적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청춘의 시기는 누구에게나 다소 ‘방황’적이기도 하고 ‘반항’적이기도 한 시기이다. 방황이 없는 청년이 있다면 이는 다소 발전이 없고, 매우 밋밋한 인격자로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청년기를 돌이켜보건데 ‘방황’이란 낱말을 빼고는 할말이 없을 만큼 암담했던 것 같다. 당시 인식을 사로잡고 있던 우선과제는 단순히 ‘살아 남는다’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질병… 몇년 간의 병원신세로 인한… 한마디로 죽을까봐 벌벌떠는 시기를 보낸 것 같다. 당시로서는 예술이나 학문 등은 실현할 수 없는 동경, 꿈같은 이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다소 건강이 회복되고 동경과 이상을 실현할 시기가 오자 이번에는 생계문제… 즉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해야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산다는 것은 늘 이랬다. 현실과의 치열한 자기 싸움, 반항…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방황’과 ‘반항’의 시기가 컸던 것이 음악이나 문학 같은 예술과의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인간에게 절망이 없다면 동경도 없고 꿈도 없다. 세상이 극낙이요, 피안이라면 음악이나 시라는 것을 만들어 세상에 존재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술이란 인간이 가장 밑바닥의 절망에서 바라보는 동경의 세계… 반항의 형태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차이코프스키가 ‘비창(교향곡)’을 작곡하던 시기는 죽음을 앞둔 그의 황혼기였다. 수많은 발레곡과 오페라, 협주곡, 5편의 교향곡 등으로 이미 유명해 졌던 차이코프스키였지만 내면은 행복하지 못했고 죽음의 그림자는 의외의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참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귀족 자제와의 동성애 파문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예감된 유언장같은 것이었다. 마치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생에 대한 마지막 회상… 홀로 추는 왈츠같다고나 할까. 차가운 겨울 햇살 속에 어딘가 유쾌함이… 마치 늙은 곡예사와 같은 외로움 느끼지는 곡이다. ‘비창’만큼 서늘한 애수로 역설적 낭만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짙은 어두움… 그러나 역설속에 비상하고 있는 말할 수 없은 내면의 반향은… 청춘의 향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라는 느낌을 들게한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밤안개와 함께 들어보는 ‘비창’만큼 낭만의 절규로 가슴을 사무치게 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사실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좋아하게 된 작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머리에 꽃을 꽂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라는 뜻이다. 태평양에서 피어 오르는 물안개… 그 안개 위에 봉황처럼 솟아 있는 금문교… 땡, 땡, 종소리를 울리며 언덕 사이를 굴러가는 케이블카… 안개를 바라보면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샌프란시스코의 정취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으뜸이다. 동북쪽으로는 아름다운 대학도시(버클리)도 있다. 금문교가 내려다 보이는 버클리 힐… 밤안개가 깔릴 때면 도시가 온통 맬랑콜릭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젊음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만의 청춘의 고독… 사랑의 상처나고 깨지고 부서지는 ‘비창’의 애절함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밤의 가로등… ‘비창’이 흐르는 거리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인생의 진실한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리라… 정말로 아픈 자는 정말로 느끼는 자라는 것을 비창은 비창만의 사무치는 절규로 대변하고 있다. 너무 어두워서 차라리 밝다고할까. 어둠속의 빛… 차이코프스키가 전하는 어둠의 미학만큼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매력적이고 충격적인 슬픔으로 인간 내부에 감추어진 멜랑콜릭을 자극하고 있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낳은 최대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독일 음악의 형식주의에 대항, 개인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에 접근하려 노력했다. 특히 브람스의 형식주의를 참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만의 어떤 신탁을 받았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가 보았던 세상이 너무 애절하고 아름다운, 비창의 단면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차이코프스키가 전하는 서늘한 우수는 베토벤의 우울과는 또다른 것이었다. ‘운명’등 철학적인 우수와는 달리 차이코프스키가 전하는 멜랑콜릭한 낭만은… 톨스토이 조차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둠의 세계는 신비롭다. 밤에 듣는 음악, 밤에 반추하는 사랑… 밤에 쓰는 편지… 모두 색다르게 낭만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그러므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밤에 피어난다. 밤만이 전하는 신비… 위대한 작가들은 주로 밤에 탄생하고, 밤을 사랑하는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비창’ 등 차이코프스키의 작품도 한마디로 어두움의 산물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인생의 희망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끝없이 비통한…, 허무의 연속이자 내면의 쓸쓸한 반향만이 내비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승리도 없고 기쁨도 없다. 오로지 어둡게 떨리는 내면과의 불안한 조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창’에는 불안속에서 떨리는… 어둠속의 반향이 있다. 오로지 청춘만이 지향할 수 있는 무한대의 자유… 무한대의 절망이 피어오르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모네의 그림… 색의 향연이라고나할까…, 오늘 세계가 암담하고, 어둠이 짓누른다면…, 로맨틱 차이코프스키, 청춘의 회상인 ‘비창’을 들어보자.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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