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영(보스턴)
나는 요즘 본국 KBS-TV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1945년 서울’을 시청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 사슬에서 해방을 맞은 감격도 가시기 전에 미·소 양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민족이 좌·우로 분열되는 처절한 과정을 픽션으로 꾸민 드라마다.드라마의 내용이 역사의 진실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꾸며진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등장 인물들의 역할이 왜곡되어 유족들의 항의가 있다는 주장에는 나도 일부 동의한다.
민족이 해방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살 어린 나이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내 나이가 어느덧 고희를 넘긴 늙은이가 되었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피부로 체험하는 느낌이 든다.정신없이 고생만 하다 늙어버린 내 지금의 모습이 추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태어난 열살박이 어린 나이에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모리스’ 발신법을 외우고, 퇴비용 풀을 베러 산과 들을 헤매면서 반공호를 파고 대죽창을 만들어 생전 보지도 못한 미군을 찔러 죽이겠다고 전쟁놀이에 매달려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봐서는 안될 장면도 수없이 봤다.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답시고 진주한 소련군 ‘러스케’의 작폐(作弊)는 악독하기로 이름난 일본군에서도 보질 못했다.처음 본 소련 여군들이 나체를 드러내고 시내 남대천 개울가에서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물장구를 치고 목욕하는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야릇한 감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술에 취한 소련군 러스케들이 시내 군청 앞 광장에서 구경나온 조선인들을 총으로 쏘아죽인 잔악한 만행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의 기억이다.해방된 한국사회는 좌와 우로 편을 가르고 민족의 지도자들이 테러로 죽어갔다. 김구 선생의 남북 통일정부안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를 지지하는 세력간의 대립은 해방된 조국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큰 원인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한은 UN 한국 임시위원단의 승인과 감시 속에 국회의원을 뽑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6.25전쟁을 일으켜 400만명의 양민이 죽는 참상을 겪게 했다.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자 박헌영이나 이강국(최운혁)은 김일성이 6.25전쟁 패배의 책임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워 미군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모두 총살시켰다. 그밖의 인물 김수임(극중 김혜경)도 이강국을 도와준 간첩죄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처형되고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씨도 역사속에 이름만 남겨놓고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우리 세대가 겪은 수난은 일제하에 태어나 해방, 미군정과 좌·우 대립, 대한민국 정부수립, 여순 반란사건, 제주 4.3사건, 6.25, 4.19, 5.16, 월남 파병, 유신, 10.26, 12.12, 광주사태 등 벼라별 사건을 다 겪으며 지켜본 세대라고 하지만 지금도 생존하면서 고난의 체험을 증언하고 있는 선
배 참전용사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누가 닦아주려는지…
힘들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고생만 하고 늙은 것이 한(恨)스럽다는 말도 노병들 앞에선 가려서 해야 될 것 같다.고생만 하고 꿈 많은 청춘이 없었다는 넋두리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전란을 피해 부산까지 내려가 학교를 다니면서 이웃 판자집 여학생과 심훈의 시와 괴테, 하이네, 로맹, 보르레스의 시(詩)를 읊조렸던 피난시절의 추억도 있다.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룬 부산 제 5 육군병원엔 팔 다리가 잘린 부상병들이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처절한 장면도 봤다.
청춘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한국이란 이름 없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어간 5만4,246명의 미군 전사자에게 우린 어떤 위로의 기도를 드려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피흘려 얻은 자유를 배신으로 잃는 일은 범치 말아야 한다. 88올림픽을 치른 나라, 2번의 월드컵, 현대 차로 삼성 디지털로 국민소득 2만달러를 향해 달려가는 나라가 지난날의 고마움을 잊고 한풀이의 과거사만 뒤적거리면서 반미를 외쳐서야 되겠는가를.
피 흘려 지켜온 조국, 미국 속의 한인사회가 큰 뿌리를 내리고 자랑스런 민족으로 사는 것이 못난 노인의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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