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아무리 오래 되어도 떠나온 곳을 잊지 못하고 어쩌다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 옷 한 자락 머리카락 한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간 큰 문학행사가 있을 때마다 LA에 몇 번 다녀왔다. 행사가 끝나면 글 친구들은 우리를 ‘우정의 종각’으로 데려가곤 한다. 고국 쪽과 마주한,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샌 페드로 해안, 넓은 공원이 깨끗하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서있는 길을 따라가면 봉덕사의 에밀레종을 연상하게 하는 커다란 종과 아름다운 종각을 만난다. 그걸 볼 때마다 느끼는 건 LA 동포들의 힘이다. ‘대단하구나. 장하다. LA 동포들아’ 그렇게 속으로 뇌이곤 이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워싱턴에도 이런 게 있으면 얼마 나 좋을까. 워싱턴은 세계의 수도이며 우리 조국의 대사관도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공원을 거닐다 보면 많은 미국인들과 남미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나를 세우고 묻는다. “당신 한국사람 입니까?” 그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 그렇고 말구요.”그들의 부러움과 존경에 찬 눈을 보면 내가 LA에 사는 동포이기나 한양 어깨가 으쓱하고 목에 힘이 들어갔다. ‘이거구나. 이런 게 힘이구나.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살게 해주어야 하는데’
우리민족은 귀소본능이 유난히도 강한 민족이라고 한다. 고향을 떠나 아무리 오래 되어도 떠나온 곳을 잊지 못하고 어쩌다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면 옷 한 자락 머리카락 한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한다.
1937년 소련정부로부터 갑작스런 강제이주명령을 받았던 우리 고려인 동포들은 무조건 기차에 태워졌다. 한 달의 긴 여행 끝에 황무지에 내려졌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갈대와 모기뿐, 겨우 나이 여섯 살의 김병화 소년, 부모는 블라디보스톡에서 한꺼번에 총살을 당했고 혈혈단신 이곳에 내려졌다. 이곳에서도 동족끼리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사방으로 흩으려 놓았다. 소련인들은 김병화 소년의 부모처럼 조금이라도 똑똑한 우리 동포들은 살려두지 않았다고 한다. 인종청소는 아우슈비츠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학질에 죽어나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때 어린 소년은 스스로 팔뚝에 문신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를 잊지 말자”였다. 아무리 어린 가슴이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도 견딜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 어린이는 한 그루의 호두나무도 심었다. 팔뚝의 문신과 호두나무는 그때부터 그의 부모와 조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수의사가 되어 커다란 농장을 모범적으로 가꾸며 타슈켄트에 살고 있었다. 중국 용정 서남쪽 해란강 기슭 비암산에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억세게 자라고 있었다. 이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돌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를 닮아 우리 동포들은 이 소나무를 일송정이라 이름하게 되었고 1928년부터 애국지사들의 비밀집합장소가 되었다. 1933년 새로 만든 ‘용정의 노래’를 부르며 일송정에서 망국의 한을 씹고 구국의 의지를 다졌다. 이 ‘용정의 노래’가 바로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선구자이다.
일송정은 한 그루 단순한 소나무가 아니라 용정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뼈를 묻을 사람들이다. 우리도 이역만리 남의 땅 한가운데 뿌리를 내린 호두나무와 소나무 같은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될 우리 문화 상징 조형물이 필요하다. 우리의 어버이들은 물론 누구라도 시시때때로 여기 모여 망향의 정도 풀고, 조국을 떠난 후 쉬지 않고 달려온 아픈 다리도 쉬면서 앞날을 의논하면 얼마나 좋을까. 더욱이 이곳을 누리는 우리 어버이들의 생애는 더욱 보람차리라.
한인종합병원, 대규모 한인실버타운, 문화공간마련 등 할 일이 많다. 이런 일들은 하루 이틀, 한달 두 달, 일년 이년에 되는 게 아니므로 미룰 수가 없다. 1903년 정월 모진 겨울 파도를 헤치며 20여일 사투 끝에 당도한 하와이 선조들, 사탕수수밭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적게는 3할 많게는 7할까지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던 걸 생각하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일에 더는 망설이며 물러앉아 있을 수가 없다.
갈 길이 멀다. 그러기에 지금 출발해도 빠른 게 아니다. 생각 끝에 부끄럽지만 이민을 살며 영혼으로 써온 우리내외의 책 6권 300질(1800권)을 워싱턴동포들에게 바친다. 이 책이 단단한 한 장의 주춧돌로 바뀌면 누군가 조국을 사랑하는 이 기둥을 세우리라. 그리고 마침내 모든 동포들이 힘을 합해 기와를 얹으리라.
상상해 보자. 워싱턴 하늘에 올릴 종소리를. 3.1절, 8.15, 개천절, 한글날엔 종이 더 힘차게 울리리라. 바로 이곳이 우리들의 영지(領地)요 영지(靈地) 아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뿌듯하고 행복하지 않은가. 내가 LA ‘우정의 종각’ 앞에서 꾸었던 꿈, 그때 내가 뽐냈듯, 이곳 우리 아이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한미우호를 다지며 살아가는데 도움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못 할 일 무엇이겠는가. 동포라면 그 누가 이 일에 반대를 하겠는가.
■‘조선문학’ 수필 등단/‘자유문학’시등단/
수필집‘바람이 남긴 것’/재미수필문학가협원
김 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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