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아 포도 산도-태닌-당도 완벽한 밸런스
출시 2년 남았는데 예약주문 몰려 가격 폭등
2005년산 보르도가 금세기 최고의 빈티지라고 와인업계가 떠들썩하다. 2005 보르도 와인이 출시되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선예약 주문, 사전 세일이 밀려들고 있고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00년이 최고의 해라고 난리들을 쳤던 적이 불과 5년전이고, 2003년도 엄청나게 좋았던 해로 기록됐는데 이게 또 무슨 소린지, 마케팅 전략이 아닌지, 솔직히 좀 뜨아하다.
그러나 2005년 산 보르도 와인이 적포도주, 백포도주 모두 전례 없이 환상적인 맛을 보인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매년 3월말에서 4월초 사이에 ‘배럴 테이스팅’(Barrel tasting)을 실시한다. 전년 가을 수확해 담근 햇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중인 상태에서 맛보는 행사로 와인 비평가들은 이 때의 맛보기만으로 와인이 앞으로 어떻게 숙성해갈지, 언제 마시면 좋을 지를 평가하게 된다.
여기에서 로버트 파커의 평가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와인 스펙테이터 매거진의 제임스 서클링, 영국의 와인비평가 잰시스 로빈슨의 평가도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는데 이 평가를 기준으로 보르도 와인 가격과 판매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배럴 테이스팅이 끝난 후 비평가들은 일제히 “2000년이 최고의 해인 줄 알았는데 2005년은 이를 뛰어넘는, 한세기에 서너번 나올까말까 한 훌륭한 빈티지”라고 격찬했다.
2005년 보르도의 여름은 길고 무더웠다. 수십년 동안 이곳에서 포도 재배와 수확을 관장해온 현지 전문가들도 이처럼 포도 재배에 완벽한 해는 본 적이 없다고 흥분했다. 포도알이 익어가는 동안 날씨가 덥고 가물었던데다, 성숙기에 접어든 8월과 9월에는 밤에 선선한 날씨가 이어져 포도알 속의 산도와 당도와 태닌의 밸런스가 아주 훌륭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익기도 잘 익었지만 포도알의 신선도가 아주 높아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과일향과 태닌, 산도가 모두 대단히 높을 것이며 알콜 함량도 15% 이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파커는 태닌 함량이 너무 많아서 메독 지방의 와인은 앞으로 15~20년 후에나 마셔야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비평가들의 극찬과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관심과 기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가운데 와인 업체들은 미리 물량을 확보해 놓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출시하는 수량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는 급증하고 올해는 또한 생산량이 조금 줄었기 때문에 빨리 예약해 놓지 않으면 원하는 만큼 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와인 붐에 따라 미국뿐 아니라 중국, 인도, 러시아, 남미의 신흥 부자들이 와인 사재기를 시작했고, 과거에는 예약 구입을 하지 않았던 일본마저 올해는 일찌감치 이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가격이 장난이 아닐 것으로 전망된다.
보르도 그랑 크루 와인들은 ‘보르도 퓨처스’(Bordeaux futures)라는 시스템을 통해 와인이 출시되기도 전에 판매에 들어가는데 2005 보르도 가격은 2000년산 보르도 와인 가격보다 30~80%를 웃돌고 예년에 비해서는 두배 아니, 세배까지도 넘어서고 있다.
바로 지난 주 최고급 와인과 희귀 와인 판매상인 ‘아발랏’(Aabalat) 으로부터 2005 보르도 퓨처스의 가격을 전해 받았는데 그랑 크루 1등급 5개 와인과 페트루스, 슈발 블랑, 르 팽, 오손의 1 케이스(750ml 12병) 당 예약가격은 다음과 같다.
▲Chateau Haut Brion 7,200달러(병당 600달러) ▲Chateau Lafite Rothschild 7,800달러(병당 650달러) ▲Chateau Mouton Rothschild 7,200달러(병당 600달러) ▲Chateau Latour 9,000달러(병당 750달러) ▲Chateau Margaux 9,000달러(병당 750달러) ▲Chateau Ausone 6,000~7,500달러(병당 500~625달러) ▲Chateau Petrus 1만4,000~2만5,000달러(병당 1,200~2,000달러) ▲Chateau Cheval Blanc 8,400~9,600달러(병당 700~800달러) ▲Chateau Le Pin은 병당 1,000에 나오면 싼 편이라고 제임스 서클링이 예측.
이 가격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실제로 와인이 출시될 때까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무조건 예약해놓는 퓨처스 구입은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가 되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많은 와인 애호가들은 이런 와인들을 가능하면 많이 사서 와인 셀라에 재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보르도 지역에는 무려 9,000개의 샤토들이 있고 보르도 전체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한 해에 7억5,000만병이다. 2005년에 보르도의 날씨가 위의 10개 샤토들에만 햇살을 베풀었던 것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보르도 와인들은 금세기 최고의 품질을 자랑할 것이 틀림없다. 보르도에는 ‘프티 샤토’라고 불리는 질좋은 와인들이 쌔고 쌨다. 대개 미국에서 15~35 달러 선에 구할 수 있는 것들이며 그 중에는 매우 맛있는 와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보르도 와인은 지금 출시된 것을 금방 따서 마셔서는 그 맛의 진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10년 이상, 더구나 특별히 좋은 해의 고급와인은 15년 이상 묵어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으므로 지금 노년층의 와인애호가들이 2005년 산을 맛보려 한다면 최고급 그랑 크루보다 조금 더 일찍 숙성하는 보르도 와인, 즉 멀로를 주 품종으로 하는 셍테밀리옹이나 포메롤 산 와인을 사놓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래도 10년은 기다려야 하겠지만.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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