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지역 프랑스인 스위스인 150여명
뒤척뒤척 동상이몽 합동응원
SF괴테연구소 강당에서 축구영화 감상하듯
간간이 탄성 엇갈려…한국전 승리 자신만만
후반 19분. 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문전쇄도한 기각스(스위스)가 머리로 내리찍는 순간에도 “오우!” 공이 바르테즈(프랑스)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에 걸리는 순간에도 오우!
아까운 탄식인지 안도의 탄성인지 언뜻 분간이 안되는 그 소리는 후반 35분, 중원의 예술사 지네딘 지단(프랑스)의 매직패스로 스위스 수비라인이 일순간에 무너졌을 때도, 그러나 그 볼을 받은 윌토르가 너무 서둘다 그 기회를 무산시켰을 때도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반복됐다. 지단은 30대 중반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듯 시간이 흐를수록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게임의 흐름을 세밀하게 읽어내고 그 흐름을 순식간에 뒤바꾸는 감각적인 패싱력을 순간순간 보여주며 어둠 깔린 강당에 그런 나지막한 탄성이 일렁이게 했다. 티에리 앙리(프랑스)가 쏜 회심의 일발이 스위스 수비수의 손에 맞고 골문을 외면했을 때도 그런 소리는 후렴처럼 강당을 울렸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북가주 한인들이 다함께 태극물결 하나로 태극함성을 지르며 짜릿한 토고전 역전승의 기쁨을 안고 들뜬 마음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 13일 오전 9시쯤부터 11시쯤까지 약 2시간동안, 주SF 프랑스총영사관 옆 괴테연구소 강당에서는 프랑스-스위스 한판승부 응원전이 펼쳐졌다.
샌프란시스코프렌치-아메리칸상공회의소(FACCS)와 샌프란시스코스위스 아메리칸상공회의소(SACCS)가 합작으로 멍석을 깔아 베이지역에 사는 알프스이웃 두나라 축구팬 150여명이 참가한 이날 응원전은 그러나 쉴새없이 태극함성이 진동하고 끊임없이 태극물결이 요동친 태극응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사이좋게’ 진행됐다.
우리 선수들이 너무 안전하게만 하려고 했어요, 이기려는 게 아니라 지지 않으려고.
티에리 앙리의 번호(12)가 새겨진 프랑스유니폼 상의를 입고 프랑스의 삼색깃발까지 준비해온 파브리스라는 청년은 0대0 무승부로 끝난 뒤 괴테연구소를 나서며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응원 분위기 역시 살벌한(?) 응원맞대결이 아니라 축구영화 감상 같았다. 누가 프랑스팬인지 누가 스위스팬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뒤섞인 품새부터 그랬고, 실내 불을 모두 끈 채 가지런히 놓인 접이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강당 정면의 대형 벽화면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소곤소곤 속삭이며 혹은 팔짱을 끼고 묵묵히 지켜보는 장면도 그랬다. 탄식의 농도로 미뤄 그중
프랑스팬들이 훨씬 많을 것으로 짐작될 뿐 어느쪽에서 몇명이나 왔는지도 어림잡기 어려웠다. 터질 듯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골에 양쪽 모두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워볼
기회도 좀체 잡지 못했다.
역대 월드컵 성적이나 선수들 면면의 명성 등에서 알프스 봉우리와 골짜기 만큼 차이가 나는 것과는 달리, 스위스위가 다른 팀은 몰라도 프랑스에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여온 산너머 라이벌인지라 프랑스팬들은 득점없는 무승부에 실망하는 내색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팀을 응원한 듯 양쪽 팬들은 서로 다음 라운드에 같이 올라갔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삼삼오오 고요한 합동응원장을 떠났다. 다만, 어느쪽이든 한국전과 토고전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나타냈다.
이전 월드컵 때는 지주(지네딘 지단의 애칭)가 평가전에서 한국선수(김남일)의 거친 태클로 큰 부상을 당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프랑스가 부진했는데(1R 탈락) 올해는 다를 겁니다. 한국에 2대0 정도로 이길 거에요.. 지단 유니폼을 입은 청년 리카르드의 말에 스위스 유학생 스테판은 꼬리를 이었다.
한국 선수들이 비교적 작지만 빠르고 강하다는 것은 잘 알아요. 그렇지만 오늘 스위스가 어떻게 싸웠는지 봤죠? 유럽지역예선이 워낙 터프해서 본선에 출전할 기회가 적다보니 스위스축구가 좀 저평가됐지요. 두고 보세요, 우리팀이 이번 여름에 세계를 놀라게 할 겁니다. <정태수 기자>
<연재>
인류의 대제전 월드컵 76년사⑨
◆제16회 프랑스월드컵(1998년)
20세기 마지막 월드컵인 이 대회부터 본선출전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났다. 초기에는 아예 초청도 못받고(실은 초청을 받아도 갈 형편이 되는 나라 또한 드물었지만) 그후에는 수십년동안 오세아니아와 합쳐 겨우 1장을 받거나 유럽예선 턱걸이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하다, 24개국이 된 뒤로도 1장 1.5장 2장으로 감질나게 늘어나던 아시아몫 본선티켓은 2.5장(3위팀은 오세아니아 1위, 즉
호주와 플레이오프)이 됐다. 덕분에 일본이 사상처음 본선무대를 밟았다.
86멕시코 90이탈리아 94미국월드컵에 이어 4연속 본선그라운드를 밟은 태극사단의 목표이자 태극팬들의 타오르는 염원은 첫승 플러스 알파, 즉 16강 진출이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외국인선수 최다득점에 빛나는 아시아축구 100년사 최고스타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태극사단은 또 차기(2002년) 월드컵 개최국의 명예라는, 약도 되고 독도 되는 양날의 칼까지 차고 떠났다.
결과는 1무2패로 탈락. 1승 제물로 삼았던 멕시코와의 첫판에서 하석주의 절묘한 왼발 프리킥으로 사상최초 선제골을 잡으면서 한국의 첫승 꿈은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멕시코는 한국이, 적어도 당시까지는, 거북해하는 유럽팀(다른 두팀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이 아니고 몸집도 고만고만해 그나마 해볼만하다고 여긴 상대였을 뿐, 결코 약체가 아니었다. 멕시코가 ‘잘풀리면 브라질, 안풀리면
2류클럽’이란 평가처럼 기복이 심하다는 것도 한국에는 운좋으면 2류클럽을 상대하는 것이고 운없으면 브라질을 상대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하필 그날 멕시코는 1골을 먹은 뒤에 펄펄 날았다. 첫골의 주인공 하석주가 무리한 뒤태클을 걸었다가 퇴장당한 뒤 숫적으로 열세에 놓인 한국은 토끼뜀 드리블로 수비진을 농락한 블랑코의 눈부신 침투에 이은 에르난데스(2골) 보르게티(1골)의 연쇄포에 속절없이 무너져 1대3 역전패를 당했다.
태극호 0-5 참패속에
명장 히딩크와 첫만남
히딩크 감독 지휘 아래 베르캄프 다비즈 오베르마스 젠덴 코쿠 등 쟁쟁한 스타들이 포진한 네덜란드와의 둘째판은 아예 게임이 안됐다. 5대0 참패. 십리도 못가 날이 새자 성미급한 축구팬들이 들고일어나면서 차범근 감독은 대회도중 퇴출돼, 벨기와의 마지막 경기(1대1)도 못보고 혼자 귀국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축구의 소득도 컸다. 어쩌면 한국축구사 불멸의 구세주가 될 히딩크 감독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진 대회였으니.
발칸반도의 신생독립국 크로아티아는 다보르 슈케르(득점왕, 6골)의 가공할 골감각에 힘입어 일약 3위를 차지했다. 나이지리아는 내심 우승을 벼르던 스페인에 극적인 3대2 역전승,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안기며 검은 돌풍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의 말총머리 골게터이자 비아시아 선수로는 거의 유일한 불교신자인 로베르토 바조는 1라운드 칠레전과 8강전(대 프랑스)에서 거푸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94월드컵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의 망령에 벗어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누구 품에 안길까 망설이던 챔피언트로피는 중원의 마술사 지네딘 지단이 있는 프랑스를 택했다. 1라운드 사우디전에서 보복성 짓밟기로
퇴장당하는 등 출발이 매끄럽지 못했던 지단은 2라운드부터 감각적 패싱과 예술적 조율 능력을 과시하더니 호나우두를 앞세운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는 대머리에 신경이 쓰여 평소 훈련때도 거의 시도하지 않는다는 헤딩으로 2골을 뽑아내며 3대0 완승을 도맡았다. 국제축구연맹과 월드컵대회 창설을 주도한 프랑스에 때늦은 첫 우승 첫 경험을 안겨준 이민가정 출신 지단은 프랑스병의 하나로 얘기되는 이민자 차별을 완화시키는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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