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계층 위한 헌신봉사 20년…
그것은 당락을 초월한다. 표차이도 뛰어넘는다. 한인사회가 100여년 묵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또다시 흘려보내기 십상이었던 6•6•6 예비선거에 역사성을 부여한 메리 정 하야시, 1년6개월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캠페인을 마치고 마침내 후보 꼬리표를 떼어낸 그는 선거결과에 관계없이 한인사회에 소중한 그 무엇을 던졌다.
우선, 우리 한인사회가 억지로 키워준 것이 아니라 보건과 여성 분야에서 헌신적인 봉사와 투쟁으로 커뮤니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큰 인물로 성장해 전통적 민주당 강세지역구(제18지역구)에서 민주당 유력후보로 우뚝 섰다는 자체만 해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큰일을 꿈꾸는 차세대 한인들의 롤모델이 된 것도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공로다.
한인사회가 기나긴 정치적 겨울잠에서 부시시 깨어나 미국선거 참여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도 메리 정 하야시 출현에 따른 귀중한 부산물이다. 지연 따라 학연 따라 혈연 따라 게다가 정치적 이해득실 따라 갈가리 찢긴 북가주 한인사회가, 비록 충분하지는 않지만, 모처럼 그 모든 것을 초월해 함께 손잡고 더불어 나아가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하게 해줬다는 것 또한 앞으로 더욱 뿌리내리고 키워나가야할 보물같은 자산임에 틀림없다.
우울증 언니 자살충격 못잊어 정신건강 등 문제 눈떠
아이리스재단 창설, 발의안63 주도 등 헌신봉사 외길
1980년대 초 부모를 따라 북가주 미국땅에 이민온 열두살 소녀 정미경이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USF)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신건강문제 등 사회문제에 눈뜨고 옷소매를 걷어붙이게 만든 동인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언니의 자살이었다. 미국에 온 뒤로로 어렸을 적 그 충격을 잊지 못한 그는 무엇보다 먼저 상담과 치료 등 제때 어루만져주면 헤어날 수 있는 정신질환자를 돕는 봉사단체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영어에 서툴러서 가부장적 권위에 휘둘려서 고생하는 아시아계 등 소수계 여성들을 위한 권익옹호 등 점차 보폭을 넓혀갔다.
결혼도 잊은 채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봉사 외길에 들어선 그는 캘리포니아주 간호사협회 이사로 정신건강과 공중보건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어린이 정신건강 전문재단인 ‘아이리스 얼라이언스 펀드(Iris Alliance Fund)’를 창설해 지금껏 새싹들의 혼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뿐만 아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발의안63 통과를 위한 캠페인에 앞장서(이 운동의 알라메다카운티 코디네이터) 정신건강서비스법(the Mental Health Services Act)이 탄생되는 데 기여했고, 이 법에 따라 결성된 캘리포니아주 정신건강감독위원회 커미셔너가 되기도 했다. 연간소득 75만달러까지만 소득세를 법을 바꿔 그 이상 소득에 대해서도 일정비율 세금을 거두고 이를 정신병원 설립과 정신질환치료사 지원 등에 써야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 발의안 통과로, 첫해에만 2,300만달러의 정신병 치유비용이 생겨났다. 덕분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정신적 통제불능 상태에서 크고작은 죄를 저질러 감옥에 갈 뻔한 무수한 질환자들이 대신 치료소에 보내져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백악관 정신건강 컨퍼런스 등 단골스피커
알라메다카운티 리더십 어워드 등 수상자
날이 갈수록 능력과 헌신성을 인정받은 그는 미공중보건협회 가주지회장, 부모들의 정치적 각성을 꾀하고 조직화하는 재단(PPPAF)의 의장, 내셔널유방암협회 이사 등 주요 봉사직을 속속 맡으며 작은 거인(키 5피트2인치쯤)으로 성장했다.
그밖에도 헤이워드 샤봇칼리지재단, 칼스테이트EB의 정신건강연구소, 알라메다카운티 소녀재단 이사 등 직책을 맡고 있는 그를 주류사회가 놓칠 리 없었다. 레드북 매거진은 그를 “마더스 & 셰이커스(Mothers and Shakers)”의 한명으로 선정했고, 레이디스홈저널은 “주목할 여성” 리스트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디디허시 커뮤니티 정신건강센터 제정 2004년 리더십 어워드, 알라메다카운티 여성지위향상위원회 여성상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직속 여성컨퍼런스, 백악관의 정신건강 컨퍼런스와 공중보건교육협회 연례회의 단골스피커이기도 하다.
그는 또 영어도 서툴고 문화도 서툰 한국 이민소녀에서 크로스 커뮤니티 큰 인물로 성장하기까지 과정, 인생의 좌표 등을 담은 자서전 “Far From home : Shattering the Myth of the Model Minority”를 썼다.
주변 사람들 권유와 큰무대 정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바로잡고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신념과 사명감으로 지난해 초 주하원의원직 도전을 선언한 그는 말한다. “정치는 의지가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이 정치의 아름다움이다.” <정태수 기자>
<별도박스>
가족관계 학교성적 등 비본질적 질문엔 손사래
결혼직전 데니스 변호사와 뉴욕서 9•11 지켜봐
메리 정 하야시는 공무와 관계없는 가족문제 거론을 매우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캐물으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본질을 충실하라는 주문이겠지만 아마도 언니의 죽음, 부모 이혼 등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들과 연을 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가끔 서울 어머니와 통화하고 오빠와 남동생이 들르기도 한다. 남가주 여동생은 북가주로 와 선거운동 뒷바라지도 참여했다.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80년대 초 부모를 따라 이민와 북가주에서 살았다. 부모는 80년대 후반 한국으로 역이민했다. 오빠와 남동생은 따라 가고 그와 여동생은 남았다. 남가주에 사는 여동생이 먼저 결혼했다. 공교롭게도 남편은 메리 정과 마찬가지로 일본계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다는 메리 정과 역시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던(결혼 이전부터 두 사람과 절친했던 연방사회보장국 서부지청 이미영 소셜워커의 증언) 데니스 하야시 변호사(이번 선거 알라메다카운티 수피리어법원 판사직 출마자)의 결혼은 2001년10월에 있었다. 그 이전 봉사단체에서 약 4년 교제끝에 14년 나이차를 극복하고 이뤄진 늦깎이 처녀총각 결혼(당시 메리 35세, 데니스 49세)의 청혼자는 데니스였다. 왜냐고 묻는 말에 데니스 변호사는 특유의 소박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결혼에 얽힌 비화 한토막. 메리와 데니스는 그 직전 9월11일 뉴욕 월드드레이드센터에 대한 테러참사 당시 뉴욕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중이었다. 몸서리치는 그 비극을 가까이 겪으면서 둘의 사랑이 더욱 굳어졌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도 남편은 웃기만 했다. 일본계로 한국계와 결혼했으면서 중국은 가보고 한국과 일본은 안가본 그는 선거뒤 처가나라와 본가나라를 방문할 것이냐는 물음에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들 중년의 신혼부부는 자녀를 둘 계획이 없다(메리 하야시는 “동생 아이들이 내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메리 정 하야시는 메리 정 시절인 대학때 성적이 “1, 2학년때는 별로였고 3, 4학년때는 거의 A였는데 그때 마음을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봉사단체 등 바깥일에 바쁘고 학비일부를 스스로 충당하느라 이브닝클래스 와 위크엔드클래스를 주로 수강해 샌프란시스코대를 7년만에 졸업(응용경제학 전공)한 뒤 골든게이트대에서 MBA를 받았다. <정태수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