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란<수필가>
지난달 내 생일날, 남편은 퇴근길에 내 생각이 나서 사왔다며 생일 선물을 건네 주었다. 내가 노래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서 선물을 주기는 결혼한 이후, 10년 가뭄에 콩 나듯하는 사건이라 감격한 나는 기대감에 선물을 뜯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다름아닌 ‘킹콩’ DVD 였다.
극장에서 같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특히, 킹콩이 맨손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기어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단순. 무식. 과격에 무모한거 까지 너랑 킹콩이랑 어쩌면 그리 똑같냐고 감탄했던 남편은 그 날의 감동을 잊질 못하고, 가게에 그 영화가DVD로 나오자, 내가 생각나서 기어이 사 들고 집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야생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어느 날 잡혀 와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고 도심에 갇힌 킹콩이 불쌍했고, 이루지 못할 사랑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애절했고, 자신이 떠난 곳과 비슷한 장소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려는 그의 향수가 참 슬펐었는데…
어쨌거나, 나의 현실이 이렇기에, 나의 환상을 채워 주는 드라마 남자 주인공들 사이를 방황하고 혼자 번민하며 몇년이 지나도 그들을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 나는 살아왔다.
그 사람의 행복만을 빌었던 부드럽고 온화한 ‘겨울연가’의 준상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다모’의
장 두령, 불행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조건없이 상대를 사랑해주는 ‘아일랜드’의 재복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놓는 깊은 사랑을 하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무혁이…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을 헤매다 그들의 이상적인 인간성을 모두 갖춘 예수님을 내가 결국 사랑하게 되었기에, 남편은 내게 주신 선물이라 여기며 요즘 감사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있다.
살다보니, 내가 원하고 갖고 싶었던 것만 나에게 좋은 선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고난과 시련도 축복의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문득 들기 때문이다.
나는 7, 8년전쯤 힘든 수술을 두 번 연이어 받았던 적이 있었다. 수술 후, 진통제인 모르핀과 수면제로 나락에 떨어지듯 며칠씩 잠을 자다가, 간혹 병실에서 정신이 들어 눈을 떠 창 밖에 내다 보이는 하늘을 보면, 집으로 돌아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몇 주 동안, 어지럼증으로 앉아 있지도 걷지도 못했을때는, 다시 걸어 다닐수 있다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양팔은 주사 바늘 자국으로 온통 피멍 투성이었고, 어린 아이들은 울어 대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닥쳐 왔던 불운들과 육체적인 고통에, 그 당시 나의 정신도 많이 피폐되어 있었다.
그때, 잠이 들면 나는 높은 절벽에 둘러쌓인 푸른 바다 꿈을 자주 꾸고는 했다. 꿈이었지만 그곳에 가면, 잃어버린 순수한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오래 전 잊혀진 꿈들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리고, 작은 상처 하나 없는 원형의 깨끗한 영혼으로 돌아 갈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인 천국을 찾아 혼자 떠도는 꿈들을 자주 꾸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다른 형태의 삶의 고통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병실이 아닌 매일 눈을 뜨는 안방에서 아침을 맞고, 두 발로 걸어 다닐수 있는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통도 축복이라면, 크고 작은 선물들을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헤아릴수 없다. 무상으로 주어지는 오늘 하루의 시간, 화려한 꽃이건 이름모를 작은 풀잎에건 지상에 공평하고 은혜롭게 내려 주는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 공기,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과 만남…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오며 받은 선물들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은 사랑과 자비가 있는 곳, 그래서 평화로운 곳이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천국’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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