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이종욱 WHO 사무총장이 61세를 일기로 공무 중 별안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사람으로는 최초로 유엔 산하 최대 국제기구인 WHO의 수장을 맡아 일해온 지 3년밖에 안됐다. 그는 서울의대를 1976년에 졸업했으나 한번도 개업을 하지 않고 숨질 때까지 봉사활동만 펼쳤다. 그의 봉사는 의대대학시절 안양 나자로 마을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 졸업 후 나병환자 봉사 때 만나 결혼한 일본여성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와 함께 피지로 건너가 봉사인생을 계속했다.
사람들이 그를 ‘아시아의 슈바이처’라고 부르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배운 의술을 돈을 버는데 쓰지 않고 슈바이처처럼 완전히 봉사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슈바이처처럼 기독교 사랑의 정신으로 나병환자 등 빈곤환자들을 도와왔다. WHO 임기가 끝나면 아프리카에 가서 가난한 환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타임지는 2004년에 그가 펼친 조류인플루엔자(A1) 방역노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 그의 위대함을 묘술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박사를 위대한 분으로 우리는 존경한다. 독일의 철학자로, 의사로, 음악가로, 목사로, 선교사로, 그리고 신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분이다. 그는 오르간 연주가로, 바하 연구의 권위자로 음악의 대가였다. 그는 철학자로 문명을 심도 있게 분석한 ‘문명의 철학’ 상하권을 통해 철학계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추적’은 기독교신학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위대함을 90년의 그의 생애 가운데 반 이상을 아프리카(지금의 가봉)의 병든 원주민들을 돌보기 위해 바친 그의 인간애 정신과 실천에서 찾고 있다. 그는 노벨상에서 받은 상금을 아프리카의 나병환자들을 위한 병원과 요양원을 짓는데 다 썼다.
어느 사람의 위대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줄 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위의 두 사람의 예에서 찾고싶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노력해서 이룬 성공을 자신의 부귀를 위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통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이었다. 그 희생정신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산 분들이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나병환자들을 돌보다가 하나님 품으로 간 다미안(1840-1889, Damien de Veuster)신부님이 떠오른다. 벨지움에서 태어나 32세에 사제의 서품을 받은 다미안 신부는 당시 미국령 하와이 섬 중의 하나인 몰로카이의 주재신부로 파견되었다. 그 섬에는 미국 여러 지역에서 정부로부터 이송된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가 45세 되던 해 어느 날 바닷가를 걷고 있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병환자가 아닌 신부가 우리 사정을 어떻게 알겠어?”
다미안 신부는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청해서 나병환자가 되어 4년 동안 그들과 함께 나병환자로 지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펼쳐 나가다가 49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갔다. 그의 시신이 고향 벨지움으로 옮겨졌다. 몰로카이 마을사람들은 다미안 신부의 시체를 돌려줄 것을 요구, 지금은 이 섬에 신부님의 묘가 있다. 하와이 주 정부는 다미안 신부님의 동상을 워싱턴 국회의사당에 세워 그분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1948년 여수순천 반란사건 때 아들 형제(동인과 동신)를 빨치산의 총탄에 잃고도 범인을 양자로 삼아 목사가 되게 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1902-1950)목사님도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수용소 애양원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손 목사님에게 주신 비전이었다. 손 목사는 1950년 6.25때 공산군 총탄에 순교를 하신 분이다.
나병환자들을 위해 봉사한 분들 가운데 나는 이경재 신부(1926-1998)를 잊지 못한다. 1954년 내가 중학생 때 28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 명수대 주임신부로 부임해오셨다. 1970년 이 신부님은 나병환자 복지시설인 성 나자로 마을을 설립, 27년 동안 나병환자들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 가난했던 그 시절에 신부님은 나자로 마을 모금을 위해 미국을 순방했는데 1971년 내가 핏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때 다시 만나 뵙게 되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갖고 세상을 살다가 가신 분들이다.
johnhugh@hotmail.com
허종욱/한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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