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뒷모습은 속일 수 없다. 아무리 두껍게 화장한들 거짓말을 못한다. 그래서 뒷모습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익숙해 졌음을 뜻한다. 뒷모습은 너무 정직해 슬프다.” 어느 에세이집에서 본 글인데 여운이 길어 마음에 고여 있다.
문득 「아버지의 뒷모습 (背影)」이란 중국 문학가 주자청의 수필이 생각난다. 이 짧은 글에서 자식 사랑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데도 은연중에 배어 나오는 아버지의 정이 따뜻하다. 북경대학으로 떠나는 다 큰아들이 못미더워 아버지는 역까지 배웅 나온다. 쌈짓돈을 털어 아들에게 귤을 몇 알 사주려고 뚱뚱한 몸으로 철길을 가로질러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주자청은 안쓰러운 사랑을 느낀다. 마고자에 색 바랜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휘청거리는 뒷모습.
나는 어릴 때부터 동경제대 사각모에 망토를 두르신 아버지의 사진첩을 가끔 보았다.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납북(拉北) 당하신 아버지가 유물처럼 남기신 모습들이다. 어머니는 세상살이에 마음이 무너질 때면 이 사진첩을 꺼내보며 눈물을 닦으셨다.동그란 뿔테안경 넘어 깊은 눈으로 온화하게 웃으시는 아버지가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진은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켜시는 훤칠한 뒷모습 사진이다. 법학교수시던 아버지가 학생 청중들을 바라보며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주에 심취하신 모습. 후란넬 바지와 검정 구두 뒤축까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듯 지금도 잔상(殘像)이 뚜렷하다. 그 모습은 남자의 멋이 어떤 건가를 내 어린 마음에 은연중 심어주었다.
어려서부터 틈만 나면 당신의 전설을 들으며 자란 탓이지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심을 유별나게 비관했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세 번인가 아버지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어디로 가라고 하셨을까? 그 다음 번이 그림 그리는 아내를 어머니께 선보였을 때, 그리고 큰아이를 낳고 자랑스러웠던 때였다.
세월 지나 이제 나도 휘청거리는 중년의 아버지가 되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내가 아비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다. 나는 결국 엄부(嚴父)도 못되었고, 편한 친구도 못되었다. 인생의 선배로 존경받을 만큼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힘들 때 달려올 만큼 푸근한 자부(慈父)도 되지 못하였다. 중학생인 아이들을 열살 짜리라고 우겨 놀이공원 할인 표를 끊던 이 아비의 전력을 잘 아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도덕적으로도 일찌감치 낙제생이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처럼 멋지게 바이올린을 켜는 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그 기억이 너무 진해서 적어도 아이들에게 좋은 멘토(Mentor)가 되고 싶은 의욕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책 읽는 기쁨을 일깨워주고, 자신감을 길러주느라 작문이나 웅변 경연대회들에 적극 참여시키던 일. 가족여행을 짜는 재미를 함께 맛보던 일, 폭우 쏟아지는 밤, 보이스카웃 행군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야영텐트 속에서 두런두런 앞날을 나누던 일 등, 지금도 아이들이 아빠와의 좋은 추억으로 들먹이는 걸 보면 내 어줍잖은 멘토 노릇이 다 헛되지만은 않았었던 듯 싶다. 그러나 이 아비가 행복한 추억을 좀 더 만들기도 전에 아들들은 청년이 되고 말았다. 점점 그들 눈에도 히끗히끗 벗겨져 가는 내 안쓰러운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아비도 허물 많고 사랑이 필요한 가족의 일원인 것을...
올해 대학 졸업 식장에서 작은아들 유진이 내 등뒤로 와 나를 끌어안았다. “아빠, 나는 지금까지 줄 곧 아빠의 뒷모습만 보고 자라왔어요. 항상 앞장서서 가족을 위해 길을 개척해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했어요. 우리를 이끌어 주셔서 감사해요. 아빠”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니라 항상 앞서 가는 당당한 아비의 뒷모습으로 칭찬해주는 내 피붙이의 한마디가 참 고마왔다. 문득 어느 이북 하늘아래선가 평생 외로움을 안고 사셨을 나의 아버지가 그립다. ‘바이올린 타시던 뒷모습이 참 멋있으세요’라고 한번만이라도 말씀드렸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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