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을 모르고는 미국을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 역사학자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다. 한인들에게는 먼 옛날 일어났던 아득한 일 같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남북 전쟁만큼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은 없다. 펜실베니아에서 테네시, 조지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초토화됐으며 4년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미 건국이래 지금까지 다른 모든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남부인들은 아직까지 툭하면 남부기를 다는 것으로 그 때의 상처를 달래고 있다.
남북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은 노예제였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대륙 정착 때부터 그 씨앗은 이미 잉태돼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이다. 1607년 버지니아에서 첫 마을인 제임스타운이 건설됐고 1620년 현 매서추세츠 플리머스에 식민지가 탄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생겼지만 제임스타운은 물질적 부를 추구하며 건너온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플리머스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겠다고 온 사람들이 다수였다. 경제도 남쪽은 노예를 이용한 농장노동이 일찍이 자리를 잡은 반면 북쪽은 선박 건조 등 제조업이 활기를 띠었다.
미 독립전쟁은 이처럼 성격이 다른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이뤄낸 대업이었다.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압제에 대한 저항’과 ‘영국인으로서 타고난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비전을 갖고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미 ‘건국의 아버지’ 중 존 애덤스가 매서추세츠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애덤스는 미 ‘보수주의의 원조’, 제퍼슨은 ‘리버럴리즘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칭호만으로 이들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애덤스는 누구보다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지만 1770년 영국군이 시위대에 발포해 5명을 사망케 한 ‘보스턴 학살사건’ 때는 영국군의 변호사가 돼 이들이 무죄 판결을 받는데 앞장섰다. 그는 아무리 영국군이지만 시위대의 위협에 못 이겨 자위권을 발동한 것을 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반면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등 급진적인 주장을 폈던 제퍼슨은 노예제 폐지를 주창은 했으면서도 평생 노예를 소유했다. 또 그는 자기가 죽은 후에는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유언을 남긴 조지 워싱턴과는 달리 죽은 후에도 이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1796년 워싱턴이 두 번째 임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후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이처럼 성격이 판이한 두 사람이 나란히 정부통령으로 당선됐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최다 득표자가 대통령, 차점자가 부통령이 되는 당시 선거제도 때문이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있던 4년간 부통령이던 제퍼슨과는 앙숙이었다. 심지어는 ‘반역법’을 제정, 대통령이 현직 부통령을 잡아넣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계를 은퇴한 후 결국은 화해하고 자신들이 낳은 미국이라는 신생아가 자라는 모습에 만족하면서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지 딱 50년이 되는 1826년 7월4일 한날 한시에 같이 눈을 감았다.
미국 정치인들은 선거 때 격렬히 다투다가도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악수를 나누며 웃고 헤어진다.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에 참패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나를 버리고 클린턴 같은 인물에 표를 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 해일부터 카트리나 침수에 이르기까지 재난이 있을 때면 함께 달려가 돈을 모으고 피해자들을 돕는 돈독한 파트너가 됐다. 타임지는 최신호에서 이들을 ‘올해의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 올해 리스트에는 의학자 김짐용, 가수 비, 골퍼 미셸 위 등 한인이 3명이나 낀 것도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의 하나는 무슨 큰일이 있을 때 전·현직 대통령이 한 자리에 모여 농담을 주고받으며 단합을 과시하는 것이다. 당적과 사상은 다르지만 미국이라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국의 전·현직 대통령이 한자리에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