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전 파리 출장을 다녀와 적이 놀랐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도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으리만큼 파리는 십수년 전 내가 머물던 그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생 제르망 거리로 나서니 한 쪽 모퉁이의 카페 ‘뒤 마고’(Deux Magots)도 그대로고, 문을 밀치고 들어선 즉 시끌 법석대는 실내 정경 역시 예전과 똑 같다.
불어로 ‘붉은 원숭이 두 마리’라는 이름의 이 카페를 나는 특히 좋아했는데, 그 곳은 실존철학자 사르트르와 그의 계약 결혼녀 보봐르가 즐겨 출입했던 곳이다. 또 툭하면 공원의 비둘기를 잡아 끼니를 채우던 가난뱅이 작가 헤밍웨이가 죽치고 앉아 원고를 메우던 곳이었다.
허나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나는 심한 회한에 빠져들었다. 파리에서 보냈던 특파원 생활 5년을 그대로 허송한 듯한 박탈감에 빠져든 것이다. 혹시 파리에 짓눌려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파리의 무엇이 나를 그리 매료했고, 무엇을 그리 무서워했기에 파리 5년을 그토록 과공(過恭)일색으로 살았단 말인가.
파리의 찬란한 인권 때문일까. 일응 그럴 만도 하다고 느낀 건, 내가 파리에 첫 발을 들일 당시 서울은 신군부 하의 독재체제 하에 놓였고, 이 가련한 조국과 나는 거의 동갑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두 잔째 커피를 시킬 무렵 이번에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이상한 반감과 오기가 치솟아 나를 괴롭혔다. 그 순간만은 파리도 싫었다.
“까짓 사르트르면 어떻고 헤밍웨이면 뭐해. 우리가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 또 세계 최강의 IT국가 반열에 오르는 동안 너네 프랑스가 정작 이뤄 놓은 게 뭐가 있어. 뭐 하나 바뀐 게 있다면 보여 봐, 보여 보라고! 너 지금 커피 나르는 얼굴 잘 난 갸르송(남자 종업원)! 네 놈도 마찬가지지 뭐야. 예나 지금이나 툭하면 젊은 여성 관광객한테 눈웃음이나 흘리고… 또 저쪽, 온 종일 수다로 시작해 수다로 끝나는 따바(담배 가게) 집 아줌마, 당신은 뭐 별 달라? 음탕한 눈길 희번덕대는 것도 예전과 똑같고!”
오기는 이어 자학으로 번진다. “그 와중에도 네가 그토록 파리화(化)를 서둘렀던 건 무엇 때문이야?. 정말 파리지앙이 되고 싶었던 거야?”
일련의 갈등을 치르고 나니 평온이 찾아왔다. 그리고 만족했다. 십 수년 지나 이렇게 돌아와서야 그 파리를 극복한 것이다. 내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번 출장의 목적인, 재외동포 자녀들의 정체성 확립 점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용 써봤자 거주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한 정체성의 확립은 요원하다. 정체성의 확립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직설적인 표현은 삼갔지만 위에서 내가 파리를 극복했다고 말한 것은, 만약 우리가 지금 같은 열기, 지금 같은 속도로 계속 치달을 경우 프랑스쯤이야 5년 안에 가볍게 누를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최근 뉴스위크 보도 대로면, 한국은 20년 안에 세계 5위권, 2050년이 되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강 2위권에 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체성 파악이 급선무다. 정체서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내가 누구냐를 파악하는 작업으로, 나의 뿌리 찾기 작업에 다름 아니다. 해외동포의 경우 이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가장 유효한 도구가 바로 한글 교육이다.
왜냐. 모국어에는 외국어에는 없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동포 자녀에 대한 한글 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콧김을 불어넣은, 생명 창조의 연장으로 나는 본다. 카페 한곳을 더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대 후문 쪽 대로변에 나서면 ‘여우사이’라는 카페 간판을 볼 수 있다. 원래는 “여기서 우리들의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긴 옥호(屋號)로, 첫 글자만을 따 재치 있게 줄인 말인데, 이 간판을 볼 때마다 나는 기분이 썩 좋다.
사랑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연인들처럼, 우리도 이제 서로가 서로를 실컷 자랑해도 무방할 때가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결론을 내린다. 변하지 않는 나라, 변하지 않는 국민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이 그것이다. 변하지 않은 파리가 주는 교훈이다.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사업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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