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얼마 전 삼성그룹의 편법 증여가 논란을 일으키자 이 문제를 덮으려고 8,000억원의 거금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자금 혐의를 수사받고 있는 현대자동차 그룹이 대국민 사과를 통해 계열회사인 글로비스의 주식 등 1조원을 소외계층과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두 재벌이 모두 천문학적 숫자인 큰 돈을 서슴없이 사회에 기부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한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대재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없다.
그런데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렇게 큰 돈을 기부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자기의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그 돈을 이유없이 달라고 하면 줄 사람이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또 재벌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재벌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아둥바둥 애를 썼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보통사람으로는 생각도 못하는 정경유착, 편법증여, 비자금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돈을 선뜻 내놓는다면 무언가 잘못이 있
어도 큰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거금을 내면 어떤 잘못이라도 덮어질 수 있을까. 그것도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흔히 듣는 말이다. 돈이 있으면 좋은 변호사를 사서 죄가 있어도 무죄가 되지만 돈이 없으면 좋은 변호사를 쓰지 못하니
죄가 없어도 유죄가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잘못이 있을 때 큰 돈을 기부하면 무죄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한국에만 있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사회 환원이란 관행이 오래 전에 생겨났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한다는 명목으로 군사정권이 강제로 재벌들로부터 헌납 각서를 받았다. 3공 초기에 한국비료를 건설하던 삼성이 원자재에 사카린 등 소비재를 끼워 들여온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
이 터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한국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다.
5공 때는 신군부가 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하고 기업을 통폐합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인들의 헌납 각서를 강제로 받았다. 이처럼 개인재산의 사회 환원이 어떤 때는 정치권력의 강요로, 또 어떤 때는 비리기
업의 자의로 이루어졌지만 사회 환원이 속죄라는 등식으로 해석된 점은 공통적이었다.이렇게 볼 때 한국에서 사회 환원은 죄를 지은 기업이나 개인이 면죄부를 사기 위해 지불하는 거액의 댓가처럼 보인다. 기업이 잘못을 저질러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의 일부를 잘못을 대속하기 위해 지불한다면 그 돈은 받고 죄를 묻지 않는 정부는 도둑의 장물을 꿀꺽 하고 죄를 눈감
아 주는 경찰관과 무엇이 다를까. 나라에는 법이 있고 죄가 있다면 법으로 다루어질 일인데 사회 환원이 법을 제치고 나서니 돈이 요술방망인건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기업은 기부한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나쁜 짓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가 또 걸리면 번 돈 가운데 얼마쯤 사회 환원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필자가 한국에서 햇병아리 기자 시절에 경찰서를 출입했는데 그 당시 경찰서장들이 신문에 작은 기사도 나려고 불우이웃이나 고아원에 쌀 가마니와 연탄을 사서 보내는 일이 흔했다. 그럴 때 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서장이나 나나 쥐꼬리 월급을 받기는 마찬가지 처지인데 무슨 돈으로 그런 일을 한단 말이요. 경찰은 딴데 신경 쓰지 말고 강도와 도둑이나 열심히 잡아 사람들이 안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공연히 관내에서 민폐를 끼쳐 뜯어낸 돈으로 생색을 내지 말고 정도를 가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기업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겠다고 기부금을 내는 것은 세상에 둘도 없이 고마운 일이고 칭송받을만 하다. 그러나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국가와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그것은 법치주의가 아닌 ‘금치주의’의 지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재벌의 사회 환원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면죄부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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