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산책 나가는 길에 늙은 호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급경사를 이루는 언덕 중턱에 아름드리 나무가 장승처럼 턱 버티고 있어 보기에 매우 아름답다. 마치 온 사면이 자기 세상인양 큰 가지들을 맘껏 드넓게 펼치고 있는 모습이 아주 든든해 보였다.
어느 날 봄비가 한 차례 흩고 지나간 후, 오랜만에 산책을 나서니 싱그러운 봄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그와 더불어 화려하게 펼쳐진 연둣빛 봄 잔치가 내 마음을 무척 설레게 했다. 문득, 어린 시절, 봄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바구니 들고 나물 캐러 다니던 추억이 봄날의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아스라이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나물이라도 뜯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며 봄내음에 도취되어 정신없이 걷고 있던 내 발길에 언뜻 무엇인가 밟히는 느낌이었다.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는 순간 연초록빛 송충이들이 땅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며 옮기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찬찬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털복숭이 송충이가 아니고 밤꽃의 사촌이라고 할까? 송충이 크기의 밤꽃 모양을 이룬 이상하게 생긴 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잘디잔 꽃들이 연속적으로 뭉쳐 피어서 기다란 모양을 형성한 것이 마치 털이 보송보송한 송충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를 이다지도 놀라게 한 꽃의 정체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이 나를 자극하여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다. 머리 위로 큰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 가느다란 잎줄기에 길쭉길쭉하게 생긴 작은 잎사귀들이 대칭으로 마주 달린 모양이 호두나무였다. 그전에 호두나무를 몇 번 본적은 있지만 꽃을 구경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득 이 꽃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지 무척 흥미로웠다. 기다란 꽃 한 덩어리가 한 알의 호두를 만들까? 아니면 좁쌀 알만한 꽃 한 송이들이 각각 호두를 만들어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달릴지 매우 궁금해졌다.
어느 한가한 주말 시간을 내어 숲 속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 동안 무성하게 자라 야생화를 맘껏 펼쳐놓은 경치에 매료되어 넋 놓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무엇인가에 발을 잘못 디뎌 미끄러지며 넘어지고 말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며 보니 청포도 알들이 땅바닥에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이상하네! 지금 청포도가 익을 무렵도 아닌데, 누가 숲 속에 청포도를 들고 와서 먹다가 떨어뜨렸나? “혼자 중얼거리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포도가 아니고 덜 익은 호두 알 같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호두나무 아래에 마치 파란 구슬을 한 가득 쏟아 부은 것처럼 무수히 많은 호두 알들이 땅에 떨어져 도배를 한 것 같이 바닥을 파랗게 덮고 있었다.
“아니, 이럴 수가!”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호두나무가 설익은 어린 호두 알들을 다 떨구고 서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많이 털어버리고 가을에 얼마를 수확하려나 의아해 하며 올려다보는 내 눈길에 호두 알은 전혀 보이지 않고 무성한 이파리만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설마 다 떨어진 것은 아니겠지. 어딘가 잎새 뒤에 감춰져서 안보이겠지.” 생각하며 맥없이 떨어진 풋 열매들을 안타까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밑을 지날 때마다 유심히 바라보는 내 눈에는 호두 열매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큰 나무가 열매 하나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왔다. 처음엔 실한 과실을 맺고자 나무 스스로 선별 작업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무가 비록 크고 튼튼해 보이지만 너무 늙어서 힘이 없어 열매를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영양공급이 잘 안되는구나.” 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바라 볼 때마다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산책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언덕을 향해 올라가기 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두나무 밑에 다달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히며 시원한 나무 그늘에 서서 “얼마나 힘이 없으면 열매가 영글지 못하고 다 떨어지고 말까? “곰곰이 생각하며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실바람이 풍성한 잎사귀들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덕분에 온몸에 밴 땀이 잦아들며 잎사귀들의 속삭임이 바람을 타고 내 귓전을 스치고 있었다. “너는 아니? 내 비록 너무 늙어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나의 넓은 품으로 네가 피곤할 때에 너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편안한 쉼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 말야!”
그렇구나! 힘이 빠져 늙어 간다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자. 말없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세월은 풍부한 경륜을 쌓아 주고, 그 경륜은 인생을 한층 더 폭 넓게 해주지. 마치, 벌판에 우산을 펼쳐 든 것처럼 비오는 날에 비를 피하고 인생의 오르막 길,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편안한 쉼터가 되어주는 존재처럼 말야! 그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늙은 호두나무는 살랑거리는 잎새의 바람으로 흐른 땀을 식혀주며 조용히 나를 일깨워 주었다.
■<창조문학> 등단/약사
최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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