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百想) 장기영에 대한 내 글 <아아, 왕초!>가 한국일보에 실리고 나서 여러 사람이 전화를 주셨다. 한국일보를 갓 퇴직한 문창재가 첫 전화를 건데 이어 3선 의원출신의 박실, 경희대 교수 황소웅, 전 국정원 차장 박정삼, 전 한국일보 사장 윤국병 형이 차례로 전화를 걸어 “맘에 쏙 든다”고 수다를 떨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일은, 이들이 정작 맘에 들었던 건 내 글이 아니라, 내가 글의 주인공으로 왕초 장기영을 올렸기 때문인데, 왕초얘기만 나오면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건 귀를 쫑긋 세우기 마련이다.
전화 받을 당시 나는 파리 출장 중이라서 내 수신자부담 전화 값만 턱없이 올랐지만 까짓 것 어떠랴. 우리 모두 왕초 밑에서 동문수학한 중학동 소림파 협객들 아닌가! 우리는 밤이건 낮이건, 무교동 술자리건, 아니면 이번처럼 파리의 새벽이건 일단 만났다하면 왕초를 논했다. 쫓겨난 파계승들이 모여 절 그리워하듯 왕초를 얘기했다.
어쩌다 한국일보 시절 왕초와 대결했던 무용담을 늘어놓다가도 이야기의 끝은 노상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난다. 어느 누구에게 저 본적 없는 기자출신들이면서도 왕초한테만은 늘 백기를 들었다. 우리 모두를 휘어잡은 영원한 협객, 영원한 왕초였기 때문이다.
내 경우 왕초와 첫 대결을 치른 건 입사 일년이 채 못 되던 수습기자 시절이다.
“김승웅 기자, 들어와!”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사주 실로 들어갔다. 왕초를 가까이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다. 눈매가 매섭다. 말 그대로 호랑이 눈매(虎彩)다.
“내게 요구하겠다는 게 뭐야?”조금 질린다. 허나 침착하게 첫 용건, 동료기자 하나가 취재 중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신문사가 왜 치료비를 여태껏 물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뭐야? 야, 장갑영이!” 벽력같은 소리로 비서실장을 부르더니 “총무국장 오라 해!, 아니 인사과장, 경리과장, 수송과장 다 오라 해!” 4명의 신문사 간부들이 거짓말 안보태고 1분 내에 집결, 왕초 앞에 일렬 부동자세로 섰다. 이어 내가 기절초풍할 일이 생겼다. 치료비 지급이 왜 지연됐느냐는 왕초의 심문에 네 명의 간부 모두가 약속이나 했듯 “벌써 지급했습니다!”를 연창하는 게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그 날 새벽 동료기자들의 대책 회의 때까지도 치료비 지급이 안 된 걸 확인했는데… 이 무슨 낭패인가!
“너 한국일보 기자 맞아? 몇 기(期)야? 기자 생명이 뭔 줄 알아? 확인이야, 확인!” 완전 낭패다. 내 자신한테 화가 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내가 미웠다.
“두 번째 요구는 뭐야?” “없습니다”
“없다니?” “없는 게 아니라 안 하겠다는 겁니다”
“왜 안 해?” “처음 찾아 온 기자를 이렇게 기죽여도 되는 겁니까?” 그리곤 홱 몸을 돌려 사주 실을 빠져 나왔다. 속이 이글거렸고 귀에선 왱왱 이명(耳鳴)이 울었다.
“기다려! 이봐, 김 기자!”왕초의 쇳소리를 등 뒤로 줄행랑을 쳤으나 뒤쫓아 나온 비서실장에게 붙잡혀 왕초 방으로 다시 끌려갔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
“고향이 어디야?” “금산입니다, 전북 금산!”
“금산이면 충남이쟎나?” “제가 태어날 때는 전북이었습니다” 나는 계속 볼 맨 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빗나가는 얘기지만, 고향을 묻는 질문에 나는 지금도 늘 반골이 된다. 박 정희 때는 전라도, 김 대중 집권 때는 충청도라 대답했다. 아, 나는 왜 늘 이 모양으로 살까.
왕초는 그제야 턱으로 소파를 가르쳤다. 그러고 보니 계속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석 달 후 한국일보는 기자 모두에게 월급을 10퍼센트 씩 올렸다. 왕초가 나의 두 번째 요구를 들어 준 것이다. 나의 무엇을 보고 들어줬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왕초가 세상을 떠나고 십 수년이 지난 어느 해 봄, 나 역시 파리 특파원을 마치고 한국일보와 `소리 없이` 하직했다. 그러나 지금 60을 넘긴 이 나이에도 어쩌다 술이 취해 정신을 차려보면 매번 중학동 한국일보 부근의 술집이니 이상하다. 또 그 취중에도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시인 프뢰벨의 `고엽(枯葉)` 시어처럼 으레 `소리 없이(sans faire de bruit)`치러진다는 것을.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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