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초 생전 처음 미국에 온 조카 둘이 워싱턴 DC에 갔다가 뉴욕행 앰트랙을 타려고 역에 갔다가 ID가 없어서 기차를 타지 못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뉴욕에서 워싱턴 DC로 갈 때는 그곳에 사는 사촌언니가 차로 뉴욕에 와서 함께 갔기에 신분증 생각을 아무도 못한 것이다.
아이들은 대학생이지만 미국 온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영어도 서툴고 바로 그 다음날 다니기로 한 대학교 영어프로그램 테스트가 있었다. 한창 바쁜 주중이라 그곳으로 데리러 가기도 난감한 일이었다.
수소문해보니 워싱턴 DC 차이나타운에서 맨해턴 차이나타운으로 오는 중국인 경영 시외버스가 있다고 한다. 오후 6시 출발하여 밤 10시30분 경 도착하는 버스인데 신분증 검사가 없으며 버스 비는 단돈 20달러.
한밤중에 베이사이드 집에서 맨해턴 차이나타운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서 불빛 하나 없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낯선 버스 안에서 그들이 얼마나 두려울까, 자칫 도착시간이 어긋나서 허름한 골목의 버스종점에 내리면 어쩌나 불안했다. 하지만 막상 맨해턴 브리지 아래 다소 외진 도로의 버스 종점 일대는 한밤중에도 불야성이었다.
필라델피아, 워싱턴 DC로 그 시간에도 떠나는 버스 호객꾼들, 막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데 남루한 점퍼 차림의 그들은 포장마차처럼 허름하나 김이 오르고 있는 따스한 가게 안에 들어가 음식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가진 것도 없고 돈도 없고 그야말로 막장에 든 사람들의 땀 냄새가 느껴지는 골목이었지만 그곳에 가니 궁하면 모든 것이 통한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산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리고 그 버스가 정말 고마웠다.
오랫동안 화장실도 못간 아이들을 위해 깨끗한 화장실을 찾는 것조차 사치스럽고 황당할 정도로 지저분하고 복잡했지만 돈 없고 힘없는 불법체류자들에게 숨쉴 구멍을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우리 주위에도 서류미비 한인들이 많을 것이다. 잘 나가던 사업이 무리한 확장으로 쫄딱 망하여 빈손이 되었거나 청춘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 갑자기 정리 해고된 사람, 그들은 한국에서는 사장님, 부장님 소리 들으며 사우나만 다니다가 지금은 미국 땅 어느 주방에서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새우를 까고 있을 것이다.
또 가족이나 친척 중에 기댈 사람도 없고 일할 데도 없어 하루 끼니 걱정을 하다가 요행히 비행기 삯만 마련,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밤잠 줄여가며 현재 어깨가 빠지도록 세탁소에서 옷을 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힘들고 지저분하고 거친 일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는 그들에게 불법체류자가 설 땅은 없으니 생각 고쳐먹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 있는가. 서울에서는 체면상 할 수 없는 일을 이곳에선 전혀 상관없이 할 수 있고 아이들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한다는데 앞뒤가 꼭꼭 막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국으로 무조건 가라고 할 수 있는가.
연방상원에서 심의중인 이민 개혁안들에 이들은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러나 친이민 성향의 이민개혁법이 제정, 시행되기까지 아직 갈 길은 멀다. 개혁법안들은 지난달 28일부터 2주간 상원 본회의 심의 후 최종 표결에 붙여진다. 상원 본회의를 거쳐 상하 양원조정위원회를 통과해도 부시대통령의 법안 서명이 또 남아있다.
이에 이민자 옹호단체들은 이민자 권익 시위를 비롯한 대규모 행진을 미 전국에서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지난 4월1일 국제이민자재단 주최, 본보 후원으로 불체자 사면과 센센브레너 법안 반대를 요구하는 대규모 행진이 열렸고 10일에는 미전국에서 이민법 개혁을 위한 시위가 열린다. 한인들도 적극 참여할 예정이다.
1일 브루클린 브리지를 건너는 시위대가 한인노인들이 이끄는 농악대의 장단에 맞춰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앞으로 장기간 계속될 이민법 개혁을 위한 시위에 점점 더 많은 한인들이 모여들기를 희망한다.
우리 모두 이민법 개혁을 위한 시위에 뜨거운 관심을 갖자. 내 이웃, 내 가족, 나를 위해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살랑이는 봄바람이 기분 좋게 볼을 스쳐갈 것이다.
민병임
뉴욕지사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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