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한적한 해안 마을. 황량한 바다바람만 쌩쌩 불뿐 모든 것이 죽은 듯 고요한 가난한 마을이다. 그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목사의 탄생 100주년 기념 잔치이다.
목사는 오래 전에 죽고 두 딸이 지키고 있는 목사관으로 교인들이 모여든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있다. 해묵은 갈등과 반목, 시기로 해안의 풍경만큼이나 황량한 표정들이다.
식탁에 하나 둘 음식이 놓여진다. 그 마을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최고급의 프랑스 요리들이다. 하지만 거북이, 달팽이, 상어 알 … 생경한 식 재료에 금욕주의적 신앙을 가진 마을 사람들은 거부감이 완연하다. 께름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음식을 입에 떠 넣는다.
한입, 두입 음식을 맛보면서 표정들이 바뀐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경직되었던 안면 근육들이 풀린다. 말 한마디 없던 식탁에서 대화가 터지고 얼음처럼 싸늘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훈훈하게 녹아있다. 왁자지껄 이야기 소리와 유쾌한 웃음소리 … 거액의 복권 당첨금을 몽땅 쏟아 붓고 온 정성을 다해 만찬을 준비한 바베트는 부엌에서 홀로 흐뭇하다.
1988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인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의 마지막 장면이다. 음식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녹여내는지, 어떻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물어내고 가슴 속 앙금을 녹여내는지를 물 흐르듯 담담하게 보여준다.
음식은 혼자 먹으면 단순히 영양 섭취의 수단이지만 둘러앉아 같이 먹으면 전혀 다른 기능을 갖는다. 친화의 기능이다. 서먹했던 사람들이 밥을 같이 먹으면 친해지고, 오해가 있던 사람들이 식탁에 마주 앉음으로써 화해하는 일을 우리는 수시로 경험한다. 딱딱한 사업 거래일수록 상대방과 식사 자리를 먼저 가지라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적 조언이다. 이해와 용서,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하는 밥상의 위력이다.
우리말로 가족은 바로 식구(食口)이다. 함께 먹는 사람들이다. 매일 하루 세끼 밥상에 둘러앉아 같이 먹으며 한 몸처럼 끈끈한 결속감을 갖는 것이 가족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가족이 밥을 같이 먹지 않는데서 기인한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요즘 가족들은 한 집에 살면서도 얼굴 마주 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부부는 부부대로 맞벌이로 바쁘고,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학과 공부에 이중 삼중의 과외활동으로 바쁘다. 온 식구가 밥상에 같이 둘러앉은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한 가정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부모와 밥 한번 제대로 못 먹는 아이들이 마약 문제, 알콜 문제 등에 휘말릴 위험이 높다고 한다. 반면 매주 5회 이상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마약·알콜 문제도 덜 할 뿐 아니라 학교 성적도 더 좋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식습관도 더 좋다고 한다.
식구가 모여 밥 먹는 사소한 일로 이런 큰 성과가 얻어진다면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다. 밥상 앞에 같이 모이도록 의도적으로 애를 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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