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진(맨하탄 파라다이스 클리너)
해마다 그렇게 지루하던 겨울이 가고 새 봄이 오는 4월의 중순 쯤이면 나는 혼자만이 기가 막
히게 아름다운 곳을 비밀스럽게 즐기며 산책하는 곳이 있다. 그렇다고 비싼 항공료를지불하고
멀리 가는 곳도 아니고 플러싱 가까운 공원 옆의 아주 넓은 공원묘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의 공원묘지에는 특별히 아름다운 꽃나무들을 많이 심어놓은 것
같다.
목련 중에서도 황목련, 적목련은 물론 벚꽃, 참꽃 등 각가지 이름도 모르는 꽃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꽃들을 피웠는지 한적한 오후에 일을 일찍 끝내고 두시간만 작정하고 가면 그야말로 꽃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거기다가 새들의 아름다운 코러스까지 공짜로 실컷 들으며 걷다가 올
수 있다.혹자는 하필이면 묘지길을 산책하느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으리라 믿지만 그 길을 걷노라면 전연 여기가 묘지라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 아늑한 곳이고 코스도 꽃나무를 따라서 잘 배열되어 있어 큰 화원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낀다.
천천히 걸으면서 한번씩 오래된 비석에 눈길을 주노라면 대강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중반까지 산 사람들의 비석도 많고, 더러는 한국사람들의 새로운 묘지가 보이기도 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알던 사람인가 이름을 들여다 보곤 한다.
20여년 전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독일, 영국등의 교회묘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과도 또 조금 틀리게 유럽에는 많은 교회에 묘지들이 같이 있는 걸 처음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거기를 안내하는 사람의 유머러스한 멘트가 우리 일행에게 웃음을 자아
내게 했다가 또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숙연함도 느끼게 해 준 기억이 새롭다.어떤 비석이 손가락 그림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고 이상한 라틴말 같은 글이 있어서 저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라틴말이라고 하고 유명한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에는 그 이름 답게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는 글이 써 있다는 설명을 듣고 그만 큰웃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또 하나, 오래된 비석은 삼단으로 되어 있고 1,2,3 번호마다 문장들이 새겨있는 이채로운 풍경이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1.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지. 2. 나도 그렇게 웃고 있었어. 3. 그런데 지금 나 여기 누워있다네).
설명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조금 후에는 다들 숙연하게 변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고 지금도 기억된다.
잘 모르긴 하지만 뭐 거창한 철학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사람은 행복하기 위하여 산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저 행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또 누구나 다 행복하기 위하여 다들 고향을 떠나 고생을 하며 살아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것이 이 다음에 딴 곳에서 어느 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니 조금씩 알아진다는 것이다.그리고 행복은 어떤 먼 길을 가는 과정 중의 하나 하나가 즐거운 것이지 큰 집을 사놓고, 큰 가게를 사놓고, 좋은 차를 사놓고 ,아들 딸 대학 다 졸업하고 사위 보고, 며느리 보고나서 아주 한적한 그 때가 아니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행복이란 뭐 커다란 거창한 것인 줄 알고 알았는데 살아보니 일상사, 작고 작은 즐거움이었고 이렇게 산책하며 아름다운 꽃을 보고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게 생각에 잠겨보는 것,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즈음이다.
물론 지구 위에 60억 인구가 나름대로 행복의 척도가 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란 속성으로 본다면 행복이라는 것이 자꾸 내일로 미루어 이루어지는 그 무엇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또한 어느 곳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하고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하여 흘러간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일 일을 장담할 수가 없고 내일은 우리에게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쁨과 평화, 바로 지금 느껴보면 어떨까? 옛날 현자들은 지팡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좌우명으로 삼고 다녔다고 한다.“卽時現今 史無時節(그 시절이 따로 없네 지금이 그 때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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