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열렸던 WBC 국제야구대회에서 한국팀이 기대이상의 선전을 펼쳐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런 국제경기가 열릴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한국인들은 크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일이 조용히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국에서 봤을 때 그것은 특히 광(狂)적으로 비쳐졌다.
한국의 정치사회를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극히 분열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유독 스포츠에서는 항상 이렇게 ‘단합되고 일치된’ 모습을 보인다. 한반도 자체가 남북으로 잘려진 상황에서 여러 모양으로 찢어지고 갈라져 살아온 한국인들로서는 아마도 스포츠를 통해서나마 하나된 모습을 보이려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이 원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강한 애국심 때문이라고 풀이 한다. 이번 야구대회에서 한국이 한 수 위라고 여겨졌던 일본과 미국을 꺾을 수 있었던 것도 애국심 때문이었다고 한국의 언론들은 ‘분석’한다.
가령, 경기 후 소감을 물을 때 미국 선수들이라면 “잘 할 수 있어서 기쁘다, 성원해준 가족과 팬들에게 고맙다” 같은 말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한국 선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기쁘다, 다음에는 더 잘 해서 한국 야구의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때로는 ‘코리아 화이팅!’ 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애국심이 듬뿍 담긴 표현들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애국심은 대부분의 경우 ‘집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개인 각자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보여주는 조용한 애국심이 아니라, 단체가 모여서 구호를 외치며 흥분하는 집단 애국심이다. 하기는 자신의 배우자를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니라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말할 정도로 공동체주의, 단체주의, 집단주의에 익숙한 한국인들로서는 당연한 현상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집단 애국심’이 자칫 방향을 잃거나 도를 지나쳐 부작용과 악영향을 가져오지 않을까 염려도 하게 된다. ‘비뚤어진’ 집단 애국심은 배타적 민족주의, 이기적 국가주의로 치닫기 쉽고 결국 히틀러나 스탈린, 김일성 등이 저지른 것 같은 반인류적 범죄를 낳을 수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억압되고 박해받는 상황에서는 집단 애국심이 순기능을 보이지만 (IMF 구제금융의 경제위기 때 국민들이 금붙이를 모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유와 여유가 주어진 상황에서 집단 애국심은 패권적 민족주의로 변해 남을 해치는 역기능을 보이기 쉽다.
한국의 집단 애국심은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갈등이 빚어질 때면 ‘독도 사랑’이라는 모임, 노래, 티셔츠 등으로 나타나지만, 줄기세포 연구가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는 “그래도 어떻게 한국의 희망을 무참히 매도할 수 있느냐”면서 도덕이고 윤리고 다 내 팽개치는 소위 ‘황빠’들의 행패로 나타난다. 이쯤 되면 가히 일그러진 집단 애국심이다.
한국인들의 집단 애국심은 또 쉬 달아오르고 쉬 식는 한국인들의 ‘냄비 근성’ 그리고 이리 저리 쉽게 몰리는 ‘쏠림 현상’과 맞물려 애국심 마케팅, 애국심 광고, 애국심 소비 성향을 부추기는 싸구려 상업적 애국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락 스타일로 편곡한 애국가가 등장하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집단 애국심을 몸에 덕지덕지 바른 네티즌이란 사람들이 오늘도 침을 튀기며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이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북한의 틀에 박힌 노래, 연극, 영화, 스포츠, 매스게임, 응원 등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개개인의 휴머니티에 관한 진지한 논의나 성찰은 듣기 어렵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이 화제가 되어야 하는가. 집단 애국심에 눈이 흐려지고 귀가 먼 사람들은 그들이 한국인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세계 10위권 대국의 반열에 오른 국민들로서 한국민들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사람을 아우르는 성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되었다.
미국의 한 신문이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네델란드 응원단을 가장 훌륭한 응원단으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가 그들이 자국 선수들 뿐아니라 다른 나라 선수들도 ‘열광적으로’ 응원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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