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김병현! 또 한번의 김병현의 징크스에 한국이 울었다. 김병현은 18일 펫코파크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WBC 준결승에서 7회초 투런 홈런을 허용하면서 다시한번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를 떨쳐내는 데 실패했다. 2002년 월드시리즈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병현은 또다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빅 타임 루저’로서의 주홍문자를 가슴에 낙인 찍고 말았다.
김병현은 보스턴 시절에도 플레이오프등 큰 경기에 약한 징크스에 시달렸고, 콜로라도(락키즈)에서도 불펜 투수로 나서서는 방어율 7점대로 얻어맞았다. 김병현의 메이저리그 5년은 정말 파란만장했다. D백스에서는 월드시리즈 악몽에 시달렸고, 보스턴에서는 손가락 욕설 추문… 그리고 콜로라도에서는 방어율이 7점대로 솟으며 마이너리그 강등설에 시달린 바 있다. WBC에서도 김병현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서재응이 3차례나 선발로 나섰고, 박찬호가 선발 마무리를 오가며 스포트라잇을 받는 동안 김병현은 선발도 마무리도 아닌, 중간계투 요원으로 잠깐씩 나서며 감독(김인식)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반영했다. 아마도 월드시리즈나 보스턴 시절에서의 김병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한국의 감독에게도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WBC의 준결승, 승부의 분수령이 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김병현이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왜 김병현은 7회초 전병두가 선두 2루타를 허용, 한국이 결정적인 실점 찬스를 맞게 되자 마운드에 오른 것일까? 김인식 감독이 그만큼 김병현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인 타자에 대한 연구가 그만큼 철저해서 김병현만이 막을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을까? 대답은 천만의 말씀이다. WBC에서의 김병현의 활동 내력으로 비추어 볼 때 김병현은 당시 불끄기 보다는 희생양으로 등판했을 공산이 크다. 막으면 좋고, 못막아도 어차피 김병현은 이번 대회에서 제껴놓은(?) 패전 처리 투수였을 공산이 크다. 재응, 찬호보다는 김병현이 희생양(?)으로는 제격이었을 것었다. 물론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WBC 대회를 통해 시종 불펜요원으로 활약했던 김병현이 그 상황에서 등판한 것은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감독이 김병현을 보다 신임했다면 7회초를 개시할 때 전병두 보다는 김병현을 내세웠어야 옳았다. 승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실점 위기를 맞자 김병현을 내세운 것은, 긍정적인 면으로 보자면 김병현의 구위가 그만큼 위력있다는 감독의 판단이요, 부정적인 면으로 보자면 패전의 방패막이로 쓰겠다는 심중의 방증이었다.
사실 김병현은 지난 수년간 메이저리그에서 숫한 부침을 격으면서 긍정적인면 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 많이 심어주었다. 지난해에는 불펜 강등에 이어 트레이드 소문까지 나돌아 메이저리그에서 미아 내지는 선수생명이 끝장날 위기까지 몰렸다. 그러나 김병현은 요행이 얻은 선발찬스에서 매경기 역투, 부활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중반기 부터 보여준 김병현의 구위는 메이저리그 상위급에 속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전문가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콜로라도 언론도 김병현을 꼭 붙들어 두어야 할 재능있는 투수로 주목했다. WBC에서 김인식(감독)이 김병현을 신뢰하지 못한 것은 한국팀으로서는 불행이었다. 준결승에서의 위기, 그 순간은 결코 김병현이 설자리가 아니었다. 최소 한 경기에서는 김병현이 선발로 등판했어야 했다. 김병현은 자신의 주장대로 위기를 굳건하게 틀어막을 수 있는 강심장도 아니요, 자신이 만든 리듬을 타고가는, 정말 선발체질인지 모른다. 물론 이번 WBC에서 박찬호가 보여주었듯, 그리고 존 스몰츠(브레이브즈의 선발, 마무리 투수) 등 다른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보여주고 있듯, 투수의 보직 연연은 한갖 핑계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WBC의 최대 피해자가 김병현이라고 볼때, 한 선수에 대한 편견없는 평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과론이지만 김병현을 3회까지만이라도 선발로 나서게 했으면 어땠을까? 물론 한국은 투수력 보다는 방망이의 빈곤으로 졌지만, 김병현에 대한 투수 운용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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