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정옥희
손녀딸과 같이 푸치니(Puccini)의 오페라’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을 보러갔다. LA 날씨답지 않게 가슴팍으로 찬바람이 기어드는 저녁이었다.
나비부인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늘 보면서 나는 아마 이 이야기가 일본인 어떤 작가가 쓴 이야기를 푸치니가 오페라로 만든 것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이었다. 푸치니가 1858-1924년 때 사람이고 첫 번째 나비부인 오페라가 상연된 것은 1904년이었다. 당시 일본은 막부정치가 왕실정치로 옮겨가며 구미와 이미 통상을 시작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푸치니는 늘 오페라 소재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 일에 미치도록 심혈을 쏟아야 좋은 그릇을 구워낼 수 있는가 보았다. 1900년 런던의 듀크오브요크 극장에서 데이빗 바라스코가 피에르로티의 소설’ 마담 클리싼텐’ 연극을 찾아가 보고 푸치니는 필경 이것은 좋은 작품감이라 여겨 연극의 권리를 사서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1904년 초연은 실패하고 같은 해 수정한 것이 대 성공을 이루었다고 했다.
오페라의 노래만 듣고야 아무리 영어에 능통한 사람일지라도 어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요사이는 무대 윗면에 자막이 나와서 무대와 자막을 동시에 볼 수 있어 이해하기 좋다. ‘명성황후’ 상연 때 자막을 읽은 내 사위가 돌아오는 길에 대원군을 못마땅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무대는 참으로 심플하다. 꼬불한 오솔길이 있고 오솔길 너머에 바다가 조명으로 비추어져 있고 무대 중앙에 네모난 칸막이가 있다. 그게 다다. 그 칸막은 아마 다다미방으로 설치한 것으로 나는 보았다. 우리나라 7,80년대의 연극은 무대장치가 엄청난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었다. 한 막이 끝나면 내려진 막뒤에서 많은 일꾼들이 망치로 퉁탕거리는 소리를 우리는 듣곤 했다. 세상은 바뀌었다.
주인공 쪼오쪼오상의 ‘쪼오쪼오’는 ‘나비’라는 일본말이고 ‘상’은 일본인들이 이름밑에 붙이는 일종의 접미사로서 ‘상’의 높임말이 ‘욘(배용준)사마’의 사마(樣)가 된다. 당시 15살의 쪼오쪼오는 이미 게이샤(藝者)여서 ‘사마’로 붙일 신분이 아니다. 내용은 일본 나가사끼 항구에 정박한 US해군 선장, 핑클턴과 쪼오쪼오와의 맺어지지 못한 애절한 사랑 스토리이다.
오늘 주인공 역활을 맡은 실제 인물 페트리시아는 게이샤의 이미지와는 약간 멀다고 느꼈으나 얼마 안가서 빨려들어가는 그 목소리. 그래서 페트리시아는 나비부인 외에도 ‘라트라비아타’‘칼멘’등 유명한 오페라의 주인공을 많이 맡은 성악가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만화에 나오는 일본 사무라이옷 비슷한 것을 입었고 일본사람들의 고유한 신발인 ‘게다’를 신은 것을 은유했는지 쪼꼬쪼꼬 걷는다. 쪼오쪼오와 결혼하려는 선장앞에 가난한 쪼오쪼오의 일가친척들이 몇 십명이 모여든다. 선장이 내 집에서 나가라고 소리지를 때 나는 1세기 후인 우리나라 6.25직후에 어린이들이 미군병사를 쫓아다니며 꾀죄죄한 손을 내밀고 “Give me a gum. Give me a chocolet. 먹던 것도 좋아요. 씹던 것도 좋아요.”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커미셔너로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장진영’으로 되어 있다. 반갑다. 유심히 읽어보니 서울대를 나오고 이곳 USC를 거쳐 당당히 오페라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오페라가 진행하는 동안 나는 간간히 동골납작하게 생겼을 한국인 장진영을 찾고 있었다. 어디서건 한국인의 딱지를 나는 벗지 못하고 산다.
쪼오쪼오는 한결같이 핑클턴 선장을 사랑하였다. 선장이 귀국발령을 받았을 때 쪼오쪼오는 데려가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 떠났다. 그날부터 쪼오쪼오는 눈이 짓물도록 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핑클턴의 아들이 다 크도록 기다린다. 그녀는 자기의 사랑이 반드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다린다. 풍성한 음성이 오히려 강력하게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을 들어내 주고 있었다.
나는 여인의 기다리는 심정을 잘 안다. 나도 한 평생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해방 후 남쪽에 주둔한 미군과의 사랑이나 북쪽에 주둔한 로스케와의 사랑이 문장화된 것은 없어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우리네 여인들을 기다리게 해놓고 떠나버렸을까. 특히 전쟁으로 납북된 사람, 행방불명이 된 사람이 옛집으로 돌아올까봐 집을 옮기지 않고 기다리며 평생 산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나비부인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 춘향전이 떠오른 것은 나비부인은 서로의 국경이 다른 것과 춘향전은 상반계급이 다른 것으로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점이 상통해서일까 ‘위이버’같은 사람이 우리의 춘향전의 이야기를 들으면 ‘에비타’ 이상가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60년대 말인가 처음으로 춘향전이 가극으로 상영되었을 때 학생들을 인솔하고 명동의 국립국장에 갔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춘향역에 소프라노 이관옥씨와 도령역에 김동원씨가 나왔었다. 얼마나 인상깊게 보았는지 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가는 길에 부른ㅡ동녘하늘 밝아온다. 기쁜 희망 가득 차서 만날 임을 생각하니… 라든가ㅡ이렇게 보아도 내 사랑. 저렇게 보아도 내 사랑. 아무리 보아도 사랑 어여쁜 춘향 나의 사랑 ㅡ 잊어버린 데는 자작 작사해서 이제금 목청을 돋우며 잘 부르곤 한다.
춘향전의 마지막 장면은 기쁨과 환희이고 소설에는 춘향이 도령과 혼인해서 아들 삼형제와 딸 둘을 낳고 행복하다는 끝맞음인데 나비부인의 끝장면은 나를 많이 울게 하였다. 그녀는 어떤 영감이 있어서였을까. 확고하게 그날 핑클턴이 온다고 믿고 아들 아이를 옆에 놓고 가정부와 같이 뜬 눈으로 바다를 향해서 앉아 밤을 샌다. 그 이튿날 나비부인이 잠깐 눈을 붙이러 들어간 때에 기다리던 핑클턴은 미국인 아내를 데리고 나타난다. 그 아내가 아들을 데려가겠노라 했다.
나비부인은 안다. 아들이 자기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이나 반 서양얼굴을 한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보내는 것이 옳겠다고. 그녀는 단검을 꺼내 자기의 가슴을 찌른다. 서서히 쓰러지며 안간힘을 다해 머리를 들며 팔을 저으며 핑클턴의 손을 잡기를 원한다. 여러 번 반복하는데 지켜보고 서있는 핑클턴은 끝내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음악당을 나서자 문밖에서 너울대며 떨어져 땅을 치는 분수의 물소리가 여인의 한소리로 들린다. 애저녁에 내 가슴에 스며들던 냉기가 지금은 차가운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마 공기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수필집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는 마을>
<롤링힐스의 여인들>
<언덕 위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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