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주민을 텍산(Texan)이라 부르는 건 웬만한 사람이 다 안다. 허나 텍사스라는 말 자체의 뜻은? 어원이 인디언 말로,‘친구’를 뜻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같은 미국인 가운데서도 드물다.
미네소타의 뜻이 인디언 말로 ‘물안개 피어오르는 곳’임도 생소하다. 청년 시절 그곳 미네소타에서 2년 남짓 유학하고도 정작 그 뜻을 모른 채 귀국했던 나 아닌가. 같은 맥락으로 오클라호마는 ‘붉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 아이다호는 ‘연어를 먹는 사람들’ 이라는 뜻이다. 애리조나는‘작은 샘이 솟는 곳’, 매서추세츠의 원 뜻은‘큰 언덕의 등성이’… 이처럼 미 전역 50개주 가운데 30개 주명의 원산지가 인디언 말이다. 원로 재미동포 신호범(미국명 Paul Shin·71)씨의 자서전 ‘사랑하며 섬기며’에 등장하는 미국 지명 소개다.
저자는 현재 워싱턴 주상원 부의장으로 미국에 넘어와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입지전적’이라는 용어는 미국에 건너와 성공을 거둔 많은 한국 교민들에게 처음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교민 거개가 스스로를 입지전적 인물로 여기고, 사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재외동포재단이 올해 벌인 ‘자랑스런 한민족선정’의 첫 사업으로 신씨를 골라 그의 자서전을 내기로 결정했을 때 나를 포함한 간부 몇몇이 거부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교민 사회에서 입지전적이라는 말이 주는 식상함, 그리고 책이 출간된 후 막말로 “입지전적이 아닌 사람 나와 봐!”라는 반론이 나왔을 때 과연 무어라 답변 할 것인가.
상재(上梓)에 올린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우리는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허나 알게 모르게 그 책에 빠져들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야 나는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거야!… 한마디로 대어(大魚)를 건져 올린 것이다.
이 책은 일견 자서전 특유의 속성인 ‘자랑’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허나 그 다음이 소중하다. 자랑은 독자를 의식한 자랑이 아니라 반세기 넘게 산 제2의 고향 미국을 체험하는 저자 특유의 감별력 산출을 위한 성량 고르기일 뿐이다. 글 서두에 소개한 인디언 지명의 유래 설명도 저자의 박식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959년 미 연방대법원 존 마샬 대법원장이 내린 미 법조사상 ‘가장 용기 있고 고상한 판결’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판결로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백인들한테 불법과 폭력으로 땅을 빼앗겼음이 입증됐고 또 이 해를 기점으로 지금의 미합중국 부동산 소유법이 탄생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저자가 조국 대한민국한테 보이고 있는 애국심은 한 가닥의 냉광(冷光)이다. 그래서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시리게 후벼판다. 3년 전 하와이 이민 1백 주년 기념행사 때 일이다. 연사로 책정돼 하와이로 떠나려는 그에게 워싱턴 주 상원의장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신 의원! 당신은 워싱턴주 유권자들이 뽑아준 상원의원이요, 더구나 부의장입니다. 회기가 막 시작되는데 불참하겠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그날 집무실로 돌아 온 저자는 의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의장님! 당신 말이 맞습니다…(중략)…그러나 내 몸 속에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버리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잊으려 해서 잊어지는 것도 아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중략)…당신의 의견대로 내가 갈 수 없다면 나는 워싱턴 주 상원 부 의장직을 사퇴하겠습니다”
30분 후 놀랜 상·하원 의장과 주지사가 달려와 그의 출발을 격려했다.
그는 6.25시절 소년 걸인, 하우스 보이로 전전하다 열여섯 늦은 나이에 미국에 입양된, 한마디로 조국 대한민국이 버린 사내다. 그 사내가 조국을 용서하고 끌어안은 것이다. 또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30년만에 만나 포옹하고 늙은 계모 그리고 다섯 형제들까지 미국에 불러들여 독립시킨다. 조국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교민뿐 아니라 이곳 서울 시민들에게도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책은 그가 미리 쓴 묘비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에 누워있는 사람은 이중문화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알고 세계를 알게 되었다”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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