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한국은 이제 경제뿐 아니라 언론자유, 지식 정보화, 문화 컨텐츠, 스포츠 등 여러 면에서 세계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이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타가 선뜻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와 인간존중이 확립되고 상식과 정직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지적은 한국뿐 아니라 미주 한인사회에도 거의 똑같이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미주 한인들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계속 관심을 갖는 이유는 떠나온 고국에 대한 사랑과 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국의 문제와 일들이 동포사회에서 거의 그대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인간존중과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상식과 정직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만 대충 훑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도산 기업주가 귀국하여 검찰로 직행하는 것이나 주미대사가 단명하게 소환되는 모습도 그렇지만, 농민인지 전문 데모꾼인지 모를 사람들이 해외원정 데모를 벌이다 붙잡히는 것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북을 찬양하는 글이 인터넷에 무시로 뜨는 가운데 감상적 민족주의자들은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자식도 미국에서 키운 대학 교수는 반미의 선봉에서 미국 때문에 ‘6.25 통일전쟁’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일들은 그 진실성 여부를 떠나 사회정의나 상식의 측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특히 줄기세포 파동은 한국사회가 인간존중, 사회정의, 정직, 상식의 측면에서 선진국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안에서나 밖에서나 “빨간 불에 서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를 무심코, 밥먹듯이 저지르고 있다는 증좌이다.
준법정신이 실종되고 불법, 탈법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우리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낮은 도덕성, 상황 의존적인 윤리의식, 그리고 정의 불감증 때문인데, 게다가 이른바 벌떼근성, 쏠림 현상, ‘빨리빨리’ 성향, 냄비근성, 자기보다 남의 눈을 더 의식하는 성향, 결과 지상주의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인 특유의 감성적, 비이성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줄기세포 파동의 경우는 거짓이 드러난 후에도 “그게 무슨 문제냐”며 난자를 제공하겠다는 여자들이 줄을 서고, “그래도 믿습니다”며 촛불을 들고 나온다. 이렇게 극단적인 감성주의가 판을 칠 때 사실에 근거한 객관성이나 합리적 논리에 근거한 당위성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문제의 핵심이 논문조작 여부, 윤리적 정당성 여부, 기만행위 여부가 아니라 줄기세포 존재여부나 원천기술의 유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건강치 못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스스로의 책임을 돌아보기보다 너무 쉽게 남의 탓을 한다. “이게 다 미국 때문이다” 아니면 “일본 때문에 다 그렇게 됐다”고 단체로 남에게 손가락질한다. “여당/야당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다” 또는 “내가 이렇게 못 사는 것은 다 부유층, 기득권층 때문이다”라고.
한국사회가 스스로의 책무를 소홀히 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상식부족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북한의 인권이나 외국인 근로자, 세계적 빈곤, 국제협력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매우 낮다는 지적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빨간 불에 그냥 지나가지 말자”고 다짐해 보자.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의 네거리에 빨간 불이 켜져 있을 때 그냥 지나가지 않는 것은 자신과 남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에 인간성과 생명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 작은 규칙의 준수가 질서확립의 시작이고 사회정의 구현의 출발이다.
또 빨간 불에 지나가지 않는 것은 정직을 실행하는 것이고, 이로써 ‘그냥 지나가고 나중에 발뺌하기’ 또는 ‘없는 줄기세포를 있다고 조작하기’ 같은 부정직을 원천 봉쇄하게 되고 따라서 양심과 도덕성을 지키고 키우는 거름이 된다. 그리고 빨간 불에 그냥 지나가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그것은 정치인들이나 부자들이나 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다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장석정
일리노이
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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