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앵커리지 서편에 둥근 산이 누워있다. 잠자는 여인이란 전설의 산이다. 옛 거인국의 미소녀 스시트나(Susitna)는 전쟁에 나간 연인을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 후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왔지만 마을사람들은 차마 그녀를 깨우지 못한다. 풀꽃이불을 만들어 덮어주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하늘에 빌었다. 그녀는 지금도 꿈속에서 하얀 밤 - 백야(白夜)를 맞고 있다.
백야는 참 신기한 자연현상이었다. 심야인데도 해가 지지 않는다. 주위가 훤했다. 그러나 스시트나의 애달픈 사랑에 대한 연민도 잠깐, 문득 느껴지는 것은 섬뜩함이었다. 밤에 비치는 햇빛은 윤기가 없었다. 그래서 백야는 야릇한 암울함을 풍겼다. 낮도 밤도 아닌 중간지대. 밝음도 어두움도 아닌 회색 빛이었다. 환하고 푸른 풀밭에서 살아 움직이는 빛이 아닌, 폐쇄된 그늘에 숨어드는 음습한 빛이었다.
백야의 빛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렸다. 잠재의식이었을까? 그가 자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위도 상으로 알래스카와 같은 백야대(白夜帶)라는 연상 때문이었을까? 그가 쓴 명작들 -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 백치 등 -의 암울한 배경이 어쩌면 이런 백야아래서만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범죄와 참회, 희망과 절망의 회색지대에서 뒤범벅된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의 이중적 심리상태가 백야의 하늘아래서 비로소 이해가 된 셈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알래스카는 아직도 울창한 삼림과 백설을 인 연봉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앵커리지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본 기록영화에도 내륙 깊숙한 곳에 유콘 강과 북미 최고봉 멕킨리 산록은 여전히 태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가이드 청년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요 몇 년간, 알래스카도 기후가 더워진 게 피부로 느껴집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 때문이지요. 수십 년 지나면 빙하도 사라질 게 분명합니다.”
발동선을 타고 한참 내해를 거슬러 올라가 만난 빙벽은 간헐적으로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녹는 속도가 어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 바다가 지난 30년간 15%이상 사라진 걸로 밝혀졌습니다. 텍사스 만한 크기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희생될 동물이 북극곰입니다.”
북극곰은 떠다니는 부빙(浮氷)위가 서식지다. 얼음 섬들이 사라지면 부빙을 뚫고 쉬러 올라오는 바다표범을 잡아먹을 수도 없고, 빙산사이 거리가 멀어 헤엄쳐 다닐 수도 없게 된다. 결국 육지로 올라와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온몸이 눈처럼 희고 눈동자와 코만 까만 북극곰. 그래서 앞발로 코를 가리고 먹이에 접근한다는 영악한 백곰은 6백 킬로가 넘고 앞발을 들면 키가 3미터나 되는 북극의 왕자이다. 호기심도 많아 낯선 건 꼭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다는 이 아름다운 포유동물은 현재 2만 5천 마리 가량 남아있지만 이대로 가면 50년 내 멸종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난 달, 국제 유가가 사상최고치로 치솟는 가운데, 미 상원은 알래스카 북부 생태계 보존지역(ANWR)의 석유개발 계획을 간발의 차로 통과시켰다. 이 곳은 북극곰과 순록 등 45종의 야생동물들과 180여종의 조류가 서식하는 알래스카 청정자연의 마지막 보루이다. 그래서 지난 24년간 환경보호를 위해 개발이 극도로 자제되어 왔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곳도 시추선단들이 몰려오게 되었다. 개발업자들은 2025년부터 하루 백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스시트나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연인의 죽음을 알게 되듯, 우리도 유전개발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날, 원시림의 죽음을 비로소 실감할지 모른다. 개발과 자연보호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백야의 혼돈 상태를 헤매는 라스코리니코프의 이중적 심리와 많이도 닮았다. 한 여름 깊은 밤, 백야의 허공 속으로 잠못든 새 한 마리가 방향도 없이 날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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