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그 배면背面을 보다
이윤홍 2002년 당선자
그때까지 나는 나뭇잎의 앞면만을 보아왔다
지나가며 스쳐가며 그것이 나뭇잎의 전부인줄 알았다
나뭇잎들의 윤기 잘잘 흐르는 저 모습이 그들의 전부인줄
알았다
은성銀盛한 여름의 한 때, 숲으로 들어가
나무의 둥근 그늘을 만들고 있는 나뭇잎들 속에 섰다
그 때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뭇잎, 그 배면背面에서 스며나오고 있는
너무도 엷어 차마 빛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너무도 엷어 차마 보인다라고도 말할 수 없는
눈 시리도록 투명한 슬픔이 앞으로 앞으로 밀려나가서는
잎이 되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던
내가 바라보며 전부인줄 알았던 저 연 초록잎이 되고
있었다
한 순간
숲이 크고 길게 흔들렸는지
마치, 기다려 손 놓은 듯 나뭇잎 하나 발밑으로 내려앉고
터진 잎새들 사이로 바람은 뒤척거렸던가
햇살은 어른거렸던가
환한 그늘이 바싹 말라가는 동안
다시 바라본 나뭇잎 배면은
애벌레의 빈 껍질이 고치에 둘둘 말려 붙어있는, 거칠은,
무광택의 배면일 뿐
숲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백년도 더 산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비, 조금은 더 깊어진 침묵 속에서
가을의 마지막 음계위로 비는 내린다
이마에 부딪치는 사선斜線의 비는 차갑고 무겁다
한 때 내장산 단풍보다 더 붉게 타오르던 사랑의 예감
검은 잎처럼 떨어지고
조금은 깊어진 침묵
그때 우리는 보았다
비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밤을 부른다
무너진 토담의 한쪽 귀가 빗소리에 젖고
한낮을 앞질러 내려앉는 정밀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한마리 짐승
뼈 속까지 벌어진 깊은 상처와
그 속으로 스며드는 가을의 깊은 우수憂愁
비는 상처를 씻으며 흘러내린다
상처를 씻으며 상처를 악화시킨다
젖어본 사람은 알리라
온 몸 구석구석 소리없이 번지는 저 에테르의 치명적인 쓸쓸함을
비 그치고 나면 겨울은 성큼 흰 가슴을 드러내리라
어둠 속 부릅뜨다 스스로 감기는 시뻘건 눈빛의 잔영 앞에서
우리는 밤새도록 비의 레퀴엠을 듣는다
조금은 우울하게 조금은 가뭇하게 그러나 조금은
더 깊어진 침묵 속에서
<2001년 창조문학 신인상 / 시집 「살아 숨쉬는 기억」>
구자애 2003년 당선자
*말렝카
**오귀기아 섬을 향해 달리다
썬셋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각기 다른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나는 애써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30초, 20초, 10초…
눈물이 고여 비쳐지기 전에 신호가 바뀌어야 한다
곁과 곁을 사이에 두고
묵묵히 달려야 하는 비장함의 속도에
가 닿을 수 없는 線을 가두고
어느 쪽도 축이 될 수 없게
마음 견주는 알. 피. 엠이
가늘게 떨고 있다
잠긴 슬픔을 엑세레타처럼 밟으며
혼자 소리내어 말해 본다
평행!
역시 맞닿지 않는 입술,
그 사이로 긴 시간 잘 말아진 동그란 소리가
행간 속에 젖어 있었는지
녹턴되어 흘러 나온다
‘너무도 아름답게
서러워져 있는 이 길을 平行이라 하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면면함을 바퀴라 하네
멀리서 바라볼 때만이
가까워져 있는 두 선을 비익조(比翼鳥)라 하네’
* 작곡가 김희갑이 91년 모스크바 국립교향악단과 함께 만든 곡이다. (40대 비련의 여인을 주제로 한 작품)
** 오디세우스가 괴물이 사는 여러 개의 섬을 지나 아흐레 밤이 되던 날,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요정이 사는 환상의 섬, 오귀기아에 도착한다
폐 선
겁 없이 돛을 달고
태평양 건너 표류한 사내는
정어리 대신 값싼 햄버거 먹으며
아파트 2층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지 서너 해 째다
물살 다독이며 고래 낚는 법
이제 겨우 익혔을 뿐인데
오늘 아침 혈압 오른 삶이
통째로 혈맥을 막아버렸다
선장 잃은 갑판 위로
울부짖는 여린 파도 소리
진종일 철썩이는 사나운 곡소리가
한 때 만선이었을 때처럼
쉴새없이 튀어 오른다
사내가 평생 껴입었던 바람이
한 겹 두 겹 벗겨져
뚫린 희망 속으로 치솟고
무거워진 뱃머리 균형 잃은 채
연실 기우뚱 댄다
끝까지
움켜쥐고 싶었던 바다와
순간 놓아버린 세상이
스르르 녹아버리는
한줌도 안 되는 포말이었다니,
방향 틀지 않는 사내
더 이상 돛을 달지 않는다
거스러진 파도의 곡선 위로
아슬아슬 피해 가는
또 한 척의 배가 위태롭다
<2002년 「문학산책」신인상>
한미주 2005년 당선자
고등어
집 나간 지 보름만에 붙들려와 픽 쓰러져 자는 딸아이 깔려진 얼음 위에 알 몸으로 누운 등 푸른 고등어처럼 모로 누워 자고 있다 곁에 쪼그리고 앉아 본다 엄마에겐 언제나 젖내가 난다던 그 냄새 때문일까 화들짝 눈을 뜬다 촛점 잃고 멀뚱히 뜬 눈 속엔 넘실대는 해풍과 소금기로 굵어진 뼈며 꿈틀거림으로 새겨진 탱탱한 무늬 비린내 나는 몸뚱이 하나 자유롭게 들어간 그물망 들려진 순간 그 허우적거림으로 채우는 낯선 공간 빛살 맞아 쓰러진 잃어버린 물살 떠나간지 오랜듯 아가미의 헐떡임이 없었다 가만히 불을 끄고 방을 나온다 쏟아지는 수돗물 소리 그 속에서 떨어진 퍼즐 다시 펄펄 살아 흔적 위로 맞춰지는 꿈 한자락 줏어들고 젖은 얼굴을 닦아 본다.
어둠을 기다리는 것 처럼
더 이상은 들어올 수 없다고 턱 버티고 선 두개의 나무 대문 사내 젖꼭지 같은 초인종 하나 안과 밖을 잇고 있었다 민밋한 유두를 건드리자 알고 있었다는듯 컹 컹 내색 두번에 그녀가 문을 연다 멀뚱히 올려다 보는 반쪽 얼굴 다른 반쪽은 벌써 안을 보고 있었다 그는 빠진 털 뭉치 마냥 엉클어진 몸을 발치 끝에 슬그머니 눕힌다 서로의 안부는 허방에 거미줄처럼 웃음을 엮고 나는 반쪽 눈과 눈을 맞춘다 놓쳐버린 한쪽 눈은 그가 지내온 십오 년을 더듬고 나는 그를 처음 본 봄날을 집어 올린다 용변 후 뒷발을 털던 모습 찾고 찾던 차 열쇠를 물고 오던 때 식구들 사이에 끼어 웃던 하얀 이빨 풍 맞아 벌어진 입 한켠으로 흐르는 침을 후르륵 메마른 혀로 핥던 일 때깔 잃은 코 끝이 실쭉거린다 시간의 본색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음을 움찔거리는 발가락으로 감지 할 수 있었다 저녁 노을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감은듯 뜬 눈으로 그냥 누워 있다 그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아는 것 처럼 어둠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 처럼 나는 그를 쓰다듬는다 그는 늙음의 냄새를 맡았는지 겨우 꼬리 한번 털썩거릴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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