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서울에 갔을 때 소설가인 친구 J가 대학 동창 끼리 모여 저녁이나 먹자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잘왔어, 잘왔어 하며 웃고 떠들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축배 제의가 들어왔다. 문인들 중 하나가 그날 한국 최고 권위의 문학잡지에 글이 실리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아 축하를 해주자는 것이었다. 쨍강쨍강 술잔이 부딪히고 목소리들도 커져 가는데 축배의 주인공이 한 마디 했다.
“근데 이 기쁜 날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답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자 그녀가 덧붙이는 말, “꽃다발을 바치며 무릎 꿇고 결혼해 달라기에 못이기는 척 했더니만, 끔직히 잘해주겠다던 약속은 어디가고, 내가 글 쓰는 것조차 보기 싫어 야단이란 말이예요.” 비교적 문단에 늦게 데뷰해 자신감도 크지 못했는데 문학지에서 좋은 연락을 받으니 뛸듯이 기뻐 남편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하니 화를 벌컥 내며, “나가 돌아다니지 말고 빨랑 들어와!”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느즈막히 들어가 한판 벌일 작정이라고 했다.
이를 놓고 남자고 여자고 다들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나도 무어라고 끼어들다 말고 “흠, 이런 장면이 미국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결론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곳저곳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느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친구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후 J가 귀뜸 하기를 문인 선배 한 분이 곧 나타날 것인데 요즘 의기소침해 있어 위로 해주려고 불렀으니 이야기도 붙이고 신경 좀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말이 별로 없이 사람들이 주는 술잔만 열심이 받았다. 2차로 자리를 옮겨 그분 옆에 앉게 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하노라 무언가 이야기도 나누고 소주잔이 빌 새라 열심히 소주도 따르고 했는데 효과가 있었던지 그분은 취기가 오르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100억! 100억 이라니까!”하는 대갈일성이 그분 입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화들짝 놀라 떠들던 것을 멈추고 그분을 바라보는데, 얼른 J가 나서서, “선배님은 물론 하실 수 있지요” 하고 받아넘긴다. 그러더니 조금 작은 소리로, “그런데 100억은 그렇고, 10억만 합시다. 10억이면 돼요!” 라고 덧붙였다.
그 선배는 일류대학을 나와 대기업에서 20여년간 잘 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며 집에 들어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이 그렇게 되니 그때껏 살림만 하던 부인이 꽃집을 차려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고 그 선배는 문단에서 실력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2년쯤 전부터 갑자기 글이 써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얼마전 부인이 병원에 입원을 하는 사태가 벌어져 그는 더욱 사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술기운에 선언한 것이 “100억 벌기”였던 것이다.
100억을 선언한 그는 3차로 가자고 앞장서 나섰다. 나는 주인공으로 시작한 저녁을 들러리로 끝막음하면서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그 작가가 10억을 벌수 없다면 큰일이다 싶은 위기의식이 느껴져 그들 그룹이 발간한 초 단편 소설 모음집을 펼쳐 들고 그의 역량을 확인한 다음에야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오늘의 2부는 지극히 한국적인 장면 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료의식 때문 이었던, 선후배 챙기기 때문 이었던, 하여간 다른 사람과 삶을 나누고 서로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살든 사는 맛을 더해주는 값진 자산일 것이며 발휘하는 만큼 생을 살찌워 주는 것임을 재확인한 하루였다.
김유경 Whole Wide World In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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