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혜원양 피살사건 경찰서·법원 스케치
20일 새벽 계부가 휘두른 칼에 찔려 사망한 원혜원양(15) 살인사건의 비극적인 기운은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쿡카운티 세리프에도, 계부 이종범씨의 보석심리가 열렸던 쿡카운티 법원에도 어김없이 맴돌았다.
사건 발생 9시간여 후인 20일 오전 10시경 세리프경찰국은 관공서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를 외면하지 않더라도 원양 사건으로 인한 긴장감과 분주함, 긴박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경찰국 대기실에 도착한지 10여분 정도가 지나자 한 명의 한인이 도착했다. 원양 가족이 다니던 샴버그 소재 모 한인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미리 와 있던 기자와 나눈 간단한 목례와 함께 자동적으로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말이 바로 한인 여학생 사건 때문에 오신 분이시죠 였다.
이 목사는 이미 경찰국내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원양의 어머니와 이복 남매 이모군을 만나기 위해 간단하게 면회를 신청한 후 원양 가족이 처해 있던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계부인 이종범씨와 어머니는 각각 이혼 후 재혼한 부부라는 것, 이종범씨는 친아들을 데리고 1년여전 미국으로 왔으며, 2베드룸 아파트에서 원양, 원양의 어머니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전했다. 이들 가족은 원래 문제가 많았었는데 특히 사이가 좋지 않은 원양과 이복동생 때문에 가정이 화목하지 못했다고 이 목사는 전했다. 그는 또 사실 가정 문제라는 것이 옆에서 도와준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서로 노력하면 해결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양보가 없는 것 같았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목사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안내 데스크에 있던 경찰관, 또 안에서 이따금씩 다른 경찰관이 나오며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는 사이 멀리서 또 한명의 한인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초조하고 급하지만 애써 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움직임이 역력했다. 그는 원양의 남자 친구였다. 그는 희생자의 남자 친구라는 신분 때문인지 면회 신청을 하자마자 곧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 다시 대기실에서 담임목사와 기자만 남아 있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게 대화와 침묵이 흐르는 동안 갑자기 안내데스크옆 출입 문이 열리면서 한 명의 여성경찰관과 남성 경찰관, 그리고 어린 얼굴의 한인 남학생 한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바로 원양의 이복동생 이모군이었다. 이군은 밤새 조사를 받았기 때문인 듯 피곤하고 힘든 모습이었으며, 사건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담임 목사는 이군의 얼굴을 보자 마자 이름을 불렀으나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군은 경찰관들과 함께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경찰관들이 이군을 향해 ‘너는 괜찮아’(You are fine) 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군이 사라지고 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출입문이 다시한번 열렸다. 이번에는 통역인 듯한 한인여성 한명과 함께 망연자실한 얼굴로 흐느끼고 있는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원양의 어머니인 박모씨였다. 박씨는 담임목사의 얼굴을 보면서 ‘어떡해’라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여성의 도움을 받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박씨가 입고 있던 스커트 아래 쪽에는 여전히 핏자국이 묻어 있는 상태였다. 박씨와 이군이 자리를 옮긴 후 잇달아 원양의 남자친구, 맨처음 911 신고를 했다는 한인 이웃 등이 모습을 나타냈지만 모두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사건발생 다음날인 21일 오전, 용의자 이종범씨의 보석심리가 열렸던 쿡카운티 법원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이어졌다. 오전 9시 반경 두명의 경찰관이 호위해 법정에 나타난 이씨는 파란색 상의와 하늘색 하의로 된 수의를 입고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양말을 착용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채 재판정으로 들어선 그의 양발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으며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첫 심리에 임했다. 이 자리에는 이씨와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제니퍼 서씨와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교회 목사 1명이 찾아왔다. 심리가 시작되자 검찰측의 캐티 담당검사는 이씨가 15세 의붓딸을 살해하게 된 경황을 설명했으며, 티모시 J. 챔버스 판사는 이미 소식을 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캐티 검사에 의하면 이씨는 9인치 길이의 칼날이 달린 14인치짜리 식칼을 범행에 사용했으며 등 뒤에서 찔렀을 때는 칼이 원양의 심장과 폐 등을 뚫고 관통할 만큼 깊숙이 찔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정황 설명이 끝나자 판사는 이씨의 전과경력을 질문했다. 캐티 검사는 이씨는 현재 음주운전으로 인해 보호감찰 중이며 이번 사건 이전에도 집 문을 발로 차 소동을 일으킨 혐의로 연행된 기록이 있다고 전했다.
이씨의 곁에 선 모니카 맵 피고측 관선변호사는 이씨가 41세이며,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 이외에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어 맵씨는 피고와 원고가 한국인으로, 한국어 법정 통역사를 선임하는데는 하루 이상 걸린다며 다음 주 월요일에나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 10분 동안 치러진 심리에서 판사는 이씨에게 5백만달러의 보석금 책정과 여권 압수 명령을 내리고 오는 2월 10일 오전 9시에 심리를 재개할 것을 결정했다.
<박웅진, 황진환, 송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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