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3월과 4월에 연재한 10회의 “이승만 박사사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기까지”의 후속으로, 하와이 섬에 동지촌이 어떻게 설립되었으며 어떻게 문을 닫았는가를 밝힌다. 신문 연재 성격상 각주는 생략하며, 이승만 박사의 존칭을 약하고 이승만이라고 한다. <편집자주>
앞서 말한 해군참모총장의 보고서에서 기술된 회사의 목적은 목적(purposes)이라기보다는 회사 설립의 동기 혹은 원칙(reason or principle)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보고서는 동지식산회사를 진주만 해군성과의 계약 불이행에 따르는 벌금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 국회에 상정한 법안을 보충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동지촌 사업이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시작된 것임을 강조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설명문은 단순히 미국인의 ‘동정’을 얻기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이미 1929년 4월 20일 『스타 불르튼 (Star Bulletin)』 기고문에서도 노령화해가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하여 (한인기독교회) 교인들과 의논한 끝에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였다고 서술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50세 노인이 된 이승만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더 이상 일 할 수 없는 노인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들을 한 곳에 모아 자작농을 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이상촌理想村을 설립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승만이 동지촌을 설립한 시기는 그가 임정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마찰을 빚어 상해 임정 의정원에 의해 탄핵을 당하고 (1925년 3월 18일) 대통령 직에서 면직된 때였다.
대통령직 해임은 이승만을 동지촌 일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1925년 11월 20일부터 1931년 4월 7일까지의 이승만의 일기를 통해 그가 1925년말부터 1931년 까지 5년 반 동안 동지식산회사에 전력을 기울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승만 일기에 1924년 11월 1일 이후부터 1925년 11월 20일까지 기록은 없다.) 일년에 4-6번 씩 동지촌을 방문하여 짧게는 하루, 길게는 두 달 이상을 머물렀다. 특히, 동지촌을 설립한 첫해 (1926년)에는 7개월 반을 동지촌에서 보냈다. 기존의 집 두 채에 7채의 집을 더 짓고 다섯 가족들을 포함하여 30여명의 한인들이 벌목을 하고 임야를 개간해 가면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들은 재배한 채소와 과일(포하 poha)을 힐로에서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팔았다. 힐로 상점은 Ponahawaii Street에 위치한 4,612 평방 휘트 (127평) 부지의 상점으로 1926년7월 24일에 남순명·김순남 부부에게서 4천 2백 달러에 구입한 것이었다.
이 상점은 편용석이 1928년까지 그 곳에 살면서 운영하였다. 이승만은 동지촌 운영 이외에 수년 내에 ‘우리(한인)의 은행’을 설립할 것과 15만 달러 상당의 기지와 건물을 새로 매입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은행 설립에 관한 생각은 1925년 9월에 제정된 「동지회합자회사규칙」에 포함된 ‘동지회합자회사저금부조’에 시사되어 있다.
이 저금부조는 하와이 정부에 등록된 정관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정관에 동지식산회사 자본금의 한계를 최고 20만 달러로 정한 것으로 미루어 동지촌은 이승만의 경제발전 계획의 첫 단계였고, 그가 그 다음의 장기계획도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지식산회사 자본금으로 7만 달러 모금을 예상했으나 3만여 달러 밖에 모금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의 반을 부지매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임야개간에 필요한 자금 충당은 대단히 어려웠다.
동지식산회사 자본금 수집이 잘 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한인들의 재정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19년 9월부터 1922년 4월까지 구미위원회가 모금한 기금액수는 8만 1천 달러의 독립공채 매입금과 그리고 예납금 또는 의연금 등의 명목으로 모금한 6만 7천 3백 달러였다.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기금 이외에 미주에 흩어져 살던 한인들을 위시하여 하와이에 있던 한인들은 국민회, 동지회, 그리고 부인구제회에도 기금을 내야 했다.
1920년에 하와이의 한인 인구가 4,950이었고, 1930년에는 6,461밖에 되지 않았으며, 미주 본토에 산재해 있던 한인의 수는 하와이 한인 인구의 반도 되지 않았다. 한인 1세의 인구수를 고려할 때 구미위원부가 모금한 액수만으로도 한인들에게서 더 이상의 경제적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민 온 지 20년이 지나 2세들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필요한 경비도 늘어가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들의 경제력 증가를 목표로 한 이상주의적인 동지촌이지만 한인들은 쉽사리 이 사업에 투자 할 수 없었다.
동지촌은 자구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벌목된 오히아 나무를 숯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재래식 내지는 가내용 숯가마를 만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제조업 전문 에이전트 (manufacurer‘s agent)인 D. A. Turner Company의 사장 Turner의 자문을 받고 호놀룰루직업학교(Honolulu Vocational School)의 강사인 George Winter와 많은 실험을 거쳐 과학적인 새 방법(retort and oven system)의 숯가마(charcoal oven)를 1928년 8월에 설치하고 드디어 24시간에 4톤의 숯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시험적으로 300 자루bag (이 bag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는 밝히지 않음)의 숯(ground charcoal)을 미국 서해안지역에 보냈다.
이승만은 숯은 오히아 나무 벌목의 부산물인데, 숯제조라는 것이 아주 흥미로운 사업이라고 기술했다.
이승만은 여러 숯제조업자들이 하와이 군도에 산재하여, 오히아, 구아바(guava), 알가로바(algaroba) 등의 나무로 숯을 만들지만 이들의 제조방법(pit and kiln method)이 낙후하여 2주일에 100봉지 정도의 숯을 만들어 지역시장의 수요에 응할 정도의 양조차 생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덕희
한국학센터 연구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