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청년회에 지도 법사로 소임(所任)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회원 중에 혼기를 놓친 처녀가 있었는데, 부유한 집안에 명문대 출신의 재원으로 빼어난 미모에 그림, 음악, 서예, 요리,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는 교양과 소양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당연히 젊은 총각회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는 그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도대체 청년회원들을 어떻게 단속하기에 집으로 전화를 다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청년회원 중에 행사와 관련하여 연락할 일이 있어 연락처로 전화를 했는데 어머님이 받으셨다.
내용을 모르는 어머님은 낮선 남자로부터 딸애를 찾으니 애지중지하게 키워온 딸이라 당연이 스님에게 항의전화를 한 것이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첫째로서 유독 그 애한테만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 온갖 정성을 다해서 키웠다 한다.
그리하여 혼기가 되어 여기저기서 괜찮은 중매가 수없이 들어왔으나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에 그래도 더 좋은 혼처를 가리다 보니 세월만 흘렀다 한다.
그 사이에 그 밑에 동생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가정을 이루어 원만히 잘들 살아가고 있지만, 큰애는 이제 나이도 들어 한 숨만 쉬고 있다 한다.
얘기를 듣고는 왜 그렇게 전화에 민감한지를 이해하고는 이제는 어릴 때와는 달리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해결하도록 믿고 맡기도록 하였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가 이성에 대하여 호기심과 기대가 생기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생리적, 심리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춘기(思春期)라 하는 것인데, 이 시기에는 아직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아(自我)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으므로 당연히 가정과 사회에서 지도 보호해야 한다.
너무 방만(放漫)해서도 않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금기(禁忌)하고 단속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관찰하고 대화함으로서 올바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형성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항상 적절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정교육(家庭敎育)의 근본이 아닐까 한다.
고려시대 승가(僧伽)의 가풍(家風)을 진작시킨 보조국사(普照國師)께서는 팔백년 전에 송광사 수선사(修禪社)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행(行)할 적에 처음 초심(初心)을 발하는 입문자(入門者)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은 모름지기 나쁜 벗을 멀리하고 좋은 벗과 사귀며, 계율을 엄히 지키되 지범개차(持犯開遮)를 잘 알아야 하느니라.’
지범개차(持犯開遮)란 계율(戒律)을 지킴에 있어서 한 치의 틈도 없이 엄밀하게 지켜야 되겠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범(犯)할 줄도 알아야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절(適切)한 것인가를 판단해서 지킬 것인가 파(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阿難尊者)에게 사소한 계율(戒律)은 없애라 하셨다.
캐나다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법(法)이 엄격하지만 일상생활에는 전혀 불편함을 없다. 그러나 법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 엄격함 속에서도 여유가 있는 것 같다.
어디 그 뿐이랴, 일상(日常)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것은 올바른 것이고 저러한 것은 바르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있다.
미리 어떤 사안(事案)을 결정(決定)해 놓고는 그러한 기준에 의해서 무조건 옳고 그름을 미리 판단해 버린다면 그 인생과 사회는 매우 경직(硬直)될 것이 분명하다.
적절(適切)하다고 하는 것,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가정이 행복하고 사회가 편안하며 이 세계가 평화로운 길은 바로 이 지범개차(持犯開遮)를 잘 운용(運用)하는 지혜(智慧)에 있지 않을까?
팔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보조국사의 청규(淸規)가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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