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어머니는 나지막한 단층 기와집 문을 두드렸다. 단출한 우리식구가 부산으로 피난을 간 뒤 세 번짼가 옮긴 셋집이었다. 눈이 서글서글한 소녀가 문을 열었다. 예닐곱 살쯤 내 또래다. 마음 좋아 보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뒤따라 나오며 반갑게 맞으신다. “어서 오이소. 바깥채를 깨끗이 비워놨으니 식구처럼 지내입시더.”
주인집엔 세 딸이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영희, 동갑인 선희, 그리고 막내 금희였다. 영희는 예쁘고, 공부도, 피아노도 늘 일등이었다. 그런데 새침데기로 한번도 날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선희는 사내아이 같았다. 마음도 넓고, 씩씩해서 숫기가 없던 내게 누나행세를 했다. 칭얼대는 막내를 업고 우리는 국제시장 어귀까지 가서 석빙고 아이스 케익을 사 물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선희네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갔다. 우리는 몇 년을 더 부산에 머물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옮겼다. 그 즈음, 어머니와 약수동 선희네를 찾아갔다. 영희는 우등생답게 일류인 K여고, 선희는 머리를 양 갈래로 딴 훤한 E여고생이 되어있었다. 선희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서로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함께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두 갈래로 난 강줄기들처럼 서서히 제갈 길로 흘러갔다.
삼년 전 가을인가? 동부에서 전화가 왔다. “나 선희다. 나미비아에 남편 조선교사를 두고 이곳에 아이들과 왔단다”20여 년 만인데도 친숙한 목소리. 그러나 아픔이 배어있었다. 결혼 후 10년을 서남아프리카 오지인 나미비아에서 원주민 선교를 해왔다고 한다. 근래엔 강한 자외선에 오래 노출돼 남편은 실명위기에 처하고 풍토병으로 쇠약해 있다고 했다. 믿음으로 택한 복된 길인데도 내 가슴이 저리다. 아이들이 크면서 정상적인 공부나마 시키려고 남편이 등을 떠밀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선희 가족의 미국생활은 치열했다. 남편의 선교사보조비를 쪼개 쓰며 한인교회를 무보수로 섬기고 봉사했다. 그래도 아프리카에 비하면 천국이라며 교회 내의 노인들과 장애자들을 힘써 돌보았다. 우리교회에서도 헌금을 모아 보내면 선희는 목이 메어했다. “우리 세 자매가 모두 사모들이 되었단다. 영희는 김천의 개척교회에서, 막내도 케냐에서 농아선교를 한다. 울 엄마의 사투리기도를 하나님이 너무 잘 들어주신 것 같아”하면서 웃었다.
해가 가면서, 선희 가족의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는 듯 보였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일부 교인들의 핍박이 더 힘들다고 했다. 봉사하면 할수록, 소위 붙박이 교인들이 영주권 때문이라느니,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느니 하고 던지는 말의 비수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세상 끝에서 10년을 믿음을 실천하고 온 가족들의 눈에는 동족교인들의 의심 많고 정죄하기 좋아하는 행태가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다름없음에 상처받고 있었다.
어느 날, 선희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선교지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오지에서 옳게 치료한 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싶으셨을까? 왜 하나님은 의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실까? 의인의 불행만이 하늘의 축복일까?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어”선희는 여전히 바위 같았다. 단지 본인도 방광암 판정을 받고 의사의 수술권유를 받았는데 과연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기도중이라고 털어놓았다.
“나미비아로 돌아가기로 했어. 남편의 선교지에 뼈를 묻기로. 고아들의 엄마가 되겠어. 성한 몸이 아니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감사하지” 작년 이맘 때 쯤 온 선희의 전갈이었다. 큰아이도 동부의 좋은 대학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엄마를 도우려 한국 한동 대학의 장학생으로 가기로 정했다고 했다.
새해 들어 나미비아에서 선교소식이 왔다. 우선 건강하다고 한다. 참 감사하다. 수술 안 받고도 암 증세를 별 느끼지 못하니 낫게 해 주신 걸로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고아들 틈에서 행복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남편 누운 곳에 있으니 편안해. 우리의 본향은 우리의 영혼이 쉴 수 있는 곳. 우리가 코 흘리며 자랐던 부산 옛집처럼 편안해, 아마 하늘나라의 평안이 이렇겠지?” 그녀는 언제나 누나처럼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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