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캔팅(Decanting)
와인을 좋아하게 되면 꼭 하나 장만하고 싶어지는 물건이 있다.
‘디캔터’(decanter). 밑이 넓게 퍼진, 혹은 옆으로 살짝 누웠거나,
손잡이가 달린 우아한 모양의 크리스탈 보울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일단 장식효과가 멋지기 때문에 집에 한두개쯤 갖춰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디캔터는 오래된 레드 와인을 마실 때 병 속에서 생성된 침전물을
걸러내고 따르기 위해 사용하는 유리 용기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아주 어린(young) 와인을 마실 때도 자주 사용하는데
그 목적은 침전물을 거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도주를 빨리 공기접촉 시킴으로써 거친 맛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디캔터를 사용하긴 해도 디캔팅이란 말보다는
‘공기접촉’(aerating) 시킨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병속에 갇혀있던 와인을 밑이 넓은 것에 부으면
한꺼번에 공기와 접촉하면서 거친 향과 맛 방출
거친 싸구려 와인일수록 에어레이팅 효과 높아
와인 셀렉션이 좋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서 보르도 와인을 주문하면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소믈리에가 알아서 디캔터에 와인을 담아가지고 온다.
아주 오래된 것은 당연히 침전물을 거르기 위해서이지만, 숙성기간이 10년을 넘기지 않은 와인들도 디캔터에 담아오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보르도 와인은 최소 10년 이상 숙성해야 그 진정한 맛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에어레이팅 함으로써 와인이 충분히 숨쉬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와인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는 오래된 와인을 마실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어린 와인을 빨리 숙성시키는 용도로 디캔터를 사용하는 일이 훨씬 많다. 병 속에 갇혀있던 와인을 밑이 넓은 디캔터에 쏟아부으면 와인이 한꺼번에 공기(즉 산소)와 충분히 접촉하면서 거친 향과 맛을 대량 방출시켜 숙성한 효과를 내는 것이다. 따라서 맛이 거친 싸구려 와인일수록 에어레이팅의 효과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질 좋은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 때 필터로 거르지 않는(unfiltered) 방법을 사용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와인에서도 침전물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태닌이 많은 카버네 소비뇽이나 보르도, 네비올로 같은 적포도주는 마지막 따른 잔에서 잔여물을 보게되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도 디캔터는 용도가 다양해지고 있다.
디캔팅은 주로 적포도주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화이트 와인도 디캔팅 하면 맛이 더 좋아진다는 주장도 있다. 맛이 진하고 풍부한 캘리포니아 샤도네의 경우 디캔팅을 하고나면 착 가라앉아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일부 와인 전문가들은 디캔팅의 생활화를 권장하고 있다. 오래됐거나 값비싼 와인만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 아니라 매일 마시는 에브리데이 와인도 디캔터에 따라 마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자면 나는 오래전 호주산 리델(Riedel)의 크리스탈 디캔터를 100달러도 넘게 주고 장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몇번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왜냐하면 오래된 와인의 경우 디캔팅 할 때 와인이 오랫동안 병속에서 지켜온 향과 맛을 한 순간에 잃게되어 맛이 밋밋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고, 젊은 와인은 젊은 와인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병에서 따를 때마다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여러 층의 맛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에어레이팅을 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디캔터는 하나쯤 갖춰두면 좋을 것이다. 디캔터는 모양과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고 가격대도 10달러 짜리부터 300달러까지 차이가 크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다. 반드시 비싼 것을 살 필요는 없으며 굳이 디캔터를 사지 않더라도 유리 물병이나 꽃병도 깨끗하기만 하면 사용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decanter 를 검색하면 수많은 샤핑몰이 나오는데 www.tableandhome.com에서 다양한 종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리델 카버네 미니 디캔터. 10달러.
리델 매그넘 생테밀리옹 디캔터 300달러.
리델 손가락 끼우는(Thumbs Up) 디캔터. 160달러.
레녹스 투스카니 클래식 디캔터. 54달러.
디캔터 이렇게 따른다
오래된 와인을 디캔팅 할 때는 일단 눕혀서 보관해온 와인병을 마시기 하루 전날 똑바로 세워둔다. 침전물을 바닥에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코르크가 부서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와인 병을 오픈한 다음 아주 천천히 와인을 디캔터에 따르는데 와인 병 아래 촛불을 켜거나 손전등을 비추면서 침전물이 병목을 따라 나가지 않도록 병 속을 살핀다. 와인을 거의 다 따를 무렵부터는 훨씬 더 천천히 따르면서 침전물이 목까지 왔을 때 스톱한다. 어린 와인을 디캔터에 따르는 일은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거품이 생기도록 콸콸 따라야 산소 접촉이 더 많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살살 따른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디캔터 사용 시 주의할 점은 아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제 크리스털 제품은 설거지용 브러시나 비누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혹시 비누칠을 했더라도 비눗기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아주 깨끗하게 닦아야 한다. 부드러운 디캔터 브러시를 파는 곳도 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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