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철(롱아일랜드)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 또는 ‘제석(除夕)’이라 일컫는다. ‘제(除)’자는 ‘세월이 바뀐다’(易也歲)는 뜻과 ‘지나간다’(去也)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묵은 해가 지나가고 새해로 바뀌는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 또는 ‘제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어느새 그 날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세모(歲暮)가 되면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며 마음 속에 적막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이런 때에는 혼자서 먼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가 하면, 혹은 오랜 여행길에서 돌아온 것 같은 그런 심정이다.시간이란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을 품고 있으면서 때때로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 이같은 파문을 던져주는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흔히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다짐하게 되는데, 역사는 언제나 과거와 함께 있는 것이기에 과거와의 대화가 곧 역사라고도 말한다.
‘새로운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지난 일들과의 대화 속에서 새로움을 찾자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시간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난 일들이라고 해서 모두다 휴지처럼 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난 일들 가운데는 보람되고 값있
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역사’란 지난 일들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반성해 시정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 ‘개과천선’임을 재삼 다짐해야 할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촌각을 다툰다. 우리는 지난 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움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시행착오’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는 법인즉, 지난 날의 실수나 과오를 끊임없이 부둥켜 안고 한탄과 원망을 일삼으면서 부심한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와는 거리가 먼 일로서 우매한 처사인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만 가는데
새로움을 찾지 못하는 시간의 운행은 어두운 죽음으로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한 개인을 비롯해서 나라와 민족, 그리고 전세계가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오가는 세월 속에서 새로운 역사 창조에 전력투구해야 이 지구촌이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해가 오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르고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라 작년에 비치던 태양이 그대로 하늘에 떠서 비추이며 지난해에 불던 바람이 그대로 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일의 태양을 어제의 그것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새로움을 기대하기 때문이다.새로움이란 인간이 바란다고 해서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움을 바라는
기대와 열망 가운데서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움을 일구어나가는 노력이 새로운 역사 창조의 원
동력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의 역사는 다람쥐 체바퀴 돌듯 구태의연해서는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제야’는 지난 일들과 매듭을 짓는 순간이다. 그것은 ‘결단’이라 또는 ‘각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속담은 누구에게나 거저 적용되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요즘 이 지구촌의 최대의 화제거리는 아마도 줄기세포를 빙자한 허황된 연극이라 보겠다. 이 황당무계한 일을 그저 지나가는 세월 속에 묻어버리자는 게 아니라 엄청난 대가를 치룬 삶의 교훈으로 여겨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마음은 한결 평안하지 않을까?우리는 시간의 끝없는 대하에 실려가면서도 때로는 그 흐름에 거역하면서, 때로는 새로운 물굽이를 맞을 줄도 알며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음향 중에서도 가장 장엄하고 감회 깊은 소리는 묵은 해를 울려 보내는 제야의 종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다시 생각 조차 하기 싫은 일들과 고별하는 경종이며, 새로움을 알려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어둡고 답답하고 치욕스러운 과거를 끊어버리는 통괘함이며, 맑고 깨끗한 새 아침을 맞는 기대이기도 하
다.
친구여, 어제의 찬 손을 따뜻한 손으로 바꾸어 마주 잡고 새해에는 새 마음, 새 각오로 살아가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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