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그해 가을은 아름다웠다. 9월의 미니아폴리스 - 미시시피 강변의 이 영롱한 도시는 붉고 노란 단풍의 농익은 빛깔로 수채화처럼 물들어가고 있었다. 찜통 같던 서울의 폭염을 벗어나 당도한 이 이방 도시의 가을은 삽상(颯爽)한 한줄기 바람이었다. 70년도 타는 목마름 속에 핍절했던 대학시절을 보내고 새 지평을 열었던 이 땅의 가을은 시원한 한 모금 청정수였다.
개학날이 임박해 캠퍼스근처에는 빈집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열 블록도 넘게 떨어진 아파트에서 유학봇짐을 풀었다. 낡은 건물이었으나 아내와 내겐 과분한 신혼의 보금자리였다. 더운물이 펑펑 쏟아지는 세면대며 쩔쩔 끓는 난방시설은 별천지였다.
어느 날 아내가 중고 자전거를 구해왔다. 캠퍼스까지 꽤 먼 거리를 매일 걷는 내가 안쓰러워 보인 탓이다. 학생 아파트 세일에서 손짓발짓으로 샀다고 했다. 파란 덧칠을 해 좀 촌스럽긴 해도 페달을 밝으면 안전등이 발갛게 들어왔다. 따르릉 거리는 손 요령도 달려 있었다.
나는 륙색을 메고 페달을 씽씽 밟으며 우편 배달부처럼 능숙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미네소타의 한겨울은 영하 이삼십 도나 떨어져 중강진만큼 추웠다. 홑겹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내게 아내는 가볍고 따스하다고 나일론 팬티스타킹을 입혔다. 한데에 있다가 더운 실내에 들어서면 사지가 무척 근지러웠는데 그래도 아내덕분에 얼지 않고 자전거를 탔다.
긴 겨울이 지나고 화사한 봄이 왔다. 주말이면 아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미시시피 강변 산책로를 달렸다. 아내는 싸늘한 강바람을 좋아했다. 어느 날, 스팅이란 영화에선가, 폴 뉴먼이 멋지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아내는 자전거를 배워달라고 졸랐다. 배경음악이었던 「레인 드롭스 킵 폴링 온 마이 헤드」의 멋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첫아이를 가진 참이라 미룰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배우려한 것은 둘째를 낳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얼마 후였다. 평소 겁이 많고 운동신경이 무뎌 걷는 것 빼곤 바깥운동을 즐기는 편이 아닌데 자전거는 한사코 타고 싶어했다.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이랄까? 걷는 일상에서 벗어나 달리는 해방감 때문일까? 아내는 머리카락 휘날리며 바람 속으로 날아가고 싶어했다.
아내에게 차 운전도 가르쳤는데 자전거쯤이야 나는 수월케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자전거로 배운 게 탈이었다. 안장을 내려도 다리가 닿지 않으니 자꾸 균형을 잃는다. 뒤에서 잡아주며 계속 페달을 밟으라고 독려를 해도 뒤뚱대기만 한다. 그러다가 결국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턱밑이 찢어진 것이다. 아내는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아내는 막 열살 지난 큰 아이에게 경주용 자전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을 풀듯 아이에게 매달렸다. 아이는 짧은 다리를 엇저어가며 곡예를 부리 듯 시원스레 탔다. 아내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자 산악자전거 맹훈련도 시켰다. 그 즈음, 교회에서 멕시코 선교여행 모금행사로 100마일 자전거 경주대회가 열렸다. 가이드로 뽑힌 대학생 선수들까지 백 여명이 참가한 대회였다.
지금도 아내의 환희를 잊지 못한다. 결승점에서 보니 멀리 가물가물 두 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첫 점은 대학생 가이드. 그 다음이 큰아이였다. 덩치 큰 미국아이들을 제치고 조그만 중학생이 당당 선두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악바리 근성 때문인지, 훈련덕분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는 마치 자신의 승리인양 아이를 얼싸안았다.
옛날 아내 키에 맞는 자전거를 사 주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있다. 보조바퀴를 달고라도 다시 연습을 권해볼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이제 넘어지면 쉽게 아물 나이가 아니라고 몸을 사린다. 대신 옛날 미시시피 강변을 추억하며 자주 해변가로 자전거 산책을 나가자고 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한번도 못나갔다. 얼마 전, 큰 아이를 보고 이젠 네 자전거 뒤에 타고 신나게 한번 달려 보자는 아내의 말에 움찔한다. 차고에 걸린 자전거를 꺼내 묵은 먼지를 털어 낸다. 아내에게 진 자전거 빚이 세월이 갈수록 자꾸 불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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