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일기예보를 보면 수은주가 유난히 많이 내려가는 고장이 있다. 나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가 그렇다. 춥고 긴 겨울을 마치 동면하는 곰처럼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고장 시카고. 나는 왜 그곳을 잊지 못하는 걸까?
며칠 전 햇볕이 창문 가득 쏟아지던 날. 어디로 갈 것인가 요량도 없이 슬슬 짐을 챙겼다.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 같아 짐 정리를 하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준비한 것들은 가죽장갑, 긴 목도리, 까만 모자, 목이 긴 스웨터, 장화구두 그런 것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추운 고장에서나 필요한 물건들. 플래스틱 상자 속에서 곰보다 더 긴 짐을 자고있던 물건들이다. 그것들은 캘리포니아 사막지대에선 몇년이 지나도 꺼내볼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아, 그래 그거다. 난 싸늘한 공기가 그리웠던 것이다. 눈 오는 거리를 긴 가죽 구두를 신고 걸어가고 싶었던거다. 방금 감아서 부스스한 머리라도 모자 하나만 눌러쓰면 모양이 나고, 허전하고 서늘한 목 언저리에 휙 감아 두르면 폼이 나던 이 목도리. 그 위에 가죽 잠바만 걸치면 거칠 것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머리 속의 내 지도. 마치 손오공의 손바닥 보듯 환한 거리이기도 하다.
어디로 옮겨간다는 것이 쉬운 일도 쉽게 생각할 일도 아닌데 왜 옮겨오고 나서 또 몸살을 앓는 걸까? 바보짓을 계속하면서 살고있는 내가 싫고 밉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왜 그 거리를 못 잊는 걸까? 왜 눈이 온다고 하면 강아지처럼 거리로 나가고 싶을까. 흔히 갈래머리 여학생 시절엔 첫눈 오는 날 어디서 만나자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하기도 했었다. 지키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집안을 들락날락 하면서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난다. 눈이 온다고 누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없는 지금, 눈오는 거리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을 꺼라는 절망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 가야만 할 것 같다. 그 거리에서 애틋하게 헤어진 안타까운 이별도 없건만 그 곳이 나는 그립다. 사춘기 시절도 아니고 하얀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보다 더 많은 지금이 아닌가. 마음은 어이하여 늙을 줄을 모르는 것일까 .
티켓도 준비 안된 여행 가방을 싸놓고 누웠다. 상념에 몸을 뒤채며 수십 고랑의 보리밭을 일구다가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늦은 밤에 누굴까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드니 시카고의 친구다.
“친구야 자나? 내가 보쌈김치를 담었거든. 오늘 낮에 시장 가니 싱싱한 목포 낙지가 있어서 잡아다 넣고 맛있게 했으니 새콤하게 삭을 무렵 퍼뜩 날아 오거라”
한결같이 두터운 우정을 나누던 네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이리로 이사오고 나서 세명이 여전히 잘 지나고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전화를 해주고 있는 친구들이다.
“빨리 눈 보러 와. 눈 좋아하잖아. 떡국 끓여 먹으려고 곰국도 해놓았다구” “왜 그리로 가 가지고 우리 속을 태우고 야단이야. 미워 죽겠다니까... 니는 갔지만 남아 있는 우리 생각은 안하나”
가슴이 저려온다. 그리움이 아리하게 목젖을 타고 올라온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여히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었구나. 나이 먹으면 눈물도 많고 서러움도 많아진다 더니.. 친구들 말이 공감이 되고 서늘한 후회가 가슴을 친다.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을 생각지 않고 떠나온 여자는 뒤늦은 후회로 가슴에 구멍하나 뚫어 놓고 살고 있다는 것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알기나 할런지....
오늘도 몇 가지 빠진 물건을 더 채워 넣었다. 긴소매 셔츠, 골덴바지, 두꺼운 양말. 입술연고,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반짝이는 브로치까지 가방 귀퉁이에 끼워 넣었다.
지금쯤 보쌈김치는 새콤하게 익어가고 두손을 마주 잡으며 반겨줄 친구들은 벽난로에 불을 피우려고 몸통이 거칠한 장작을 쌓아 놓고 새빨간 포도주도 준비하고 있을 게다. 검은색 모자도 쓰고 긴 목도리를 감아 두르고 가죽잠바에 장화를 신어야지.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들이 “아니 사막에 가서 살더니 까매졌네” 그러겠지. 나는 대답할거다.
“기후야 캘리포니아가 끝내준다. 햇빛도 짱짱하고...”
홍민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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