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또 한해를 보낸다. 한 장 남은 달력이 담벼락에 붙은 마지막 잎새처럼 떨고있다. 돌이켜보면 일년 내내 하루도 헛되이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세월이었다. 허나 무얼 했는지 손가락 사이로 새버린 물처럼 아무 흔적도 없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사라졌던 그 세월이 어느 샌가 지름길로 돌아와 얼굴 언저리에 주름으로 남은 것이다. 흘러간 듯 하나 어김없이 돌아오는 세월.
살아볼수록 세월은 어김이 없다. 아무리 미루어도 틀림없이 찾아온다. 20대 방황도, 30의 잔치도, 40대의 분주(奔走)도 그렇게 끝이 났다. 50대 문을 엉거주춤 연 후론 세월이 고지서를 든 빚쟁이처럼 여겨진다. 나만의 철없는 투정일까? 우리 모두가 떠나야할 그날도 어김없이 찾아오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서 마지막까지 밀어놓았던 이삿날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하이웨이를 타고 직장을 간다. 해묵은 참나무들이 아침안개 속에 수묵화처럼 드문드문 서있는 라스 트램파스 구릉을 끼고 달린다. 680을 버리고 24번으로 들어선다. 지난 20여 년을 오간 거리. 이젠 눈을 감아도 주변 풍광이 떠오르는 친숙한 내 삶의 길이 되었다. 라디오에서 탐 코크란의 「인생은 하이웨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인생은 하이웨이, 여행길 같아/가끔은 굽은 길을 돌기도 하고, 가끔 서있기도 해/ 어느 날은 바람 따라 가기도 하는 걸/ 나랑 먼 해안의 거리까지 달려 봐/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인생은 하이웨이/ 밤새워 달리고 싶어/ 당신이랑 같이 라면/ 밤새 함께 달리고 싶어”
인생 길에서 유년은 기어가고, 청년은 달려가고, 노년은 날아간다던 말이 생각난다. 속도계를 보며 내 나이를 가늠해 본다. 설핏 웃음이 난다. 여느 날의 습관처럼 제일 갓 쪽의 서행(徐行)레인에 붙는다. 이 레인에는 대부분 차들이 지정된 속도로 달린다. 출입구가 가까운 탓에 차들의 들고 낢이 빈번해 답답하긴 하지만 편안한 길이다. 빠르고 급히 달리는 것보다 안전하고 꾸준히 달려온 내 인생 길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맨 왼쪽의 급행레인을 바라본다. 젊고 큰 새차들이 쌩쌩 달린다. 어디를 가는지 한치라도 먼저 가려고 속력을 낸다. 빨리 도달하는 것이 지상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속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크다. 공격적이고 성공제일 주의자들이 선택하는 길이다. “오 분 빨리 가려다 오십 년 빨리 간다”는 군대 수칙을 되뇌며 과속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다.
내 앞길에 대형트럭이 달린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시커먼 디젤 매연을 뿜으며 시야를 가린다. 세상 살면서 저런 장벽이 앞을 가로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앞에 놓인 문제가 엄청나게 커 보여 주눅들었던 시절이 많았다. 이젠 지혜가 생겨 더 이상 뒤따르지 않는다. 문제의 덩치에 눌려 고민하지 않는다. 재빨리 추월해 앞질러간다.
픽업 트럭이 바짝 내 차 꽁무니에 붙어있다. 신경이 쓰인다. 소위 테일게이터다. 살아가면서 뒤에서 험담이나 하던 경쟁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들은 앞으로 나가려는 내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그리고 조금만 지체하면 사정없이 밀칠 기세다. 슬쩍 비켜준다. 가치 없는 경쟁은 피할 줄도 알게 된 덕이다.
가다가 길가에 선 차들을 본다. 자동차가 낡거나 정비가 불량해 낙오자처럼 서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미국사람들은 꼭 차를 대고 도와주려 한다. 이들의 몸에 밴 봉사가 부럽다. 나도 흉내내려는데 참 힘들다. 아기를 태운 아낙네가 섰는데도 그냥 지나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를 자처하는 내 위선이 참 부끄럽다. 인생의 어느 고비쯤 가야 남의 고통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오늘은 매일 나가던 출구가 공사로 막혀있다.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우리 삶이 앞으로만 갈 것 같지만 돌아갈 때도 있음도 안다. 인생 표지판을 따라 참고 가노라면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가는 법도 깨닫게 되었다. 나이를 헛 먹지만은 않았구나 생각하며 다시 웃는다. “인생은 하이웨이, 여행길 같아/가끔은 굽은 길을 돌기도 하고, 가끔은 서있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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