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에 연결이 된 동창의 안부 편지 한 구절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부부가 도서관에서 일하니까 조그만 집에 오면 불 밝히고 책 읽고 그런 단조로운 생활이야. 둘 다 너무 영악스럽게 한국서 부대끼고 살아선가, 아직도 근처 대학서 강의도 계속 들을 수 있는 이런 평화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중년에 워싱턴 DC로 이민해서 지금은 남편과 연방의회 도서관에 재직중인 그녀는 대뜸 “이철호님은 잘 계시니?”라고 물었다. 2년전 80세 나이로 타계한 내 아버지의 이름을 그녀는 자기 삼촌이나 선생님처럼 친숙하게 불렀다. 돌아가셨다고 하자 “내게 희망을 심어 준 분인데 빚을 못 갚는구나”며 아쉬워했다.
70세 가까운 나이로 미국에 와서 다시 정식 고교과정을 이수하고 칼리지에 진학한 아버지의 얘기였다. 당시 ‘70세 고교 졸업생’과 ‘최고령 대학생’이란 제하의 기사는 LA뿐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보도된 것은 알고 있었다.
먼저 정착한 시댁 분위기를 따라 소위 ‘장사’를 하는 중에 그 기사를 봤고 “그래 70세 노인도 하는데 겨우 40대인 내가 왜 못하겠어?”란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그 길로 내쳐 칼리지에 등록, 한 과목씩 공부를 시작했고 남편도 뒤를 따랐다.
한국 학력과 경력에 미국에서의 배움이 보태져 원래 책읽기 좋아하던 이들은 둘다 뒤늦게 전문직 공무원이 되어 책속에 묻혀 원하던 소박한 삶을 살게 됐다. 어둠속에 희망의 불씨를 제공했던 아버지를 그래서 잊지 못한다고 했다.
미시건주 그랜드래피츠에서 25년 이상 우체국에 근무하는 절친한 후배도 두 자녀의 고교 졸업후 근처 대학에서 강의를 듣기 시작한지 꽤 오래됐다. 그도 역시 최근에서야 아버지의 연령제한 없는 특별한 향학열이 나태함을 자극시켜서 뒤늦게나마 학교 문을 다시 두드렸다고 말했다.
정작 아버지는 사회사업과를 졸업한 후 한인 커뮤니티에 봉사한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가셨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희망을 심었다니 그리고 그 씨앗이 싹을 내고 커간다니 딸의 슬픔과 허무함이 조금은 상쇄되는 기분이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에 퍼져있는 한인사회까지 온통 휩쓸고 있는 황우석 교수의 배아 줄기세포 진위논란은 불같은 공분과 여론의 뭇매속에 결국 MBC의 PD수첩이 무조건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여전히 일부는 취재윤리를 위반했다 해서 제기된 의혹을 그냥 넘기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주장을 펴지만 대세는 황우석 교수의 압승으로 기울었다.
거의 전 국민이 논란을 제기한 PD수첩 제작진은 물론 언론계를 싸잡아 증오하며 황우석 교수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배경을 생각해봤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모처럼 전세계 최고의 자리를 선점한 ‘단군이래 최대 쾌거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과 노벨 의학상까지 받을 가능성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을 못 참겠다는 것이다.
또 전세계 난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샘플로 주문하면 치료용 줄기세포를 만들어 보내준다는 줄기세포 허브는 반도체나 자동차수출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을 안겨줬는데 이제 물 건너간다니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줄기세포가 불치나 난치병을 치료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 마음속에 가장 크게 와 닿았을 것이다. 불치병은 환자를 주변에 둔 가족들이 아니라도 생로병사의 원칙을 피해갈 수 없는 모두에게 언제 어떻게 닥칠 지 모르는 공포다.
따라서 비록 가까운 시일이 아니라도 공포의 불치병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바로 줄기세포 연구이며 황우석 교수였다. 그 불씨가 목전에서, 그것도 내부 방해(?)로 꺼져 가는데 대해 절망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면으로라도 앞날이 더 괜찮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사는 맛이 없기 때문에 폭발된 것 아닐까.
패륜범죄를 비롯한 인간 상식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이, 특히 한인사회에 날 때마다 우울하다. 신혼 10개월의 24세 남편이 연상 아내의 칼에 찔려 숨진 끔찍한 케이스도 제발 사고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의 누이가 한국 형제들과 재산다툼 끝에 피살됐다는 보도도 차라리 안봤다면 좋았겠다. 주변에서 희망이 될만한 불씨를 억지로라도 찾아내 마음속에 옮겨 심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겨울이 너무 삭막하고 추울 것 같다.
이정인 국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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