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이모님도 같은 집 같은 빈소에서 세상을 떴다. 나로서는 막말로 줄초상을 당한 셈이다. 이모님은 그림에 능했고, 일제 때 사범학교를 나와 도쿄에 유학할 정도로 인텔리 여성이었다.
귀국 후에는 내 고향 근처의 시골 갑부 집에 시집가 지주 집 종가 며느리가 됐다. 이모 내외가 살던 시골 집 마당에는 어마어마한 가죽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수 천마지기 논밭을 둘러보던 이모부 앞에 소작인 김모가 나타났다. 이모부는 김모를 만나자마자 욕설과 함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간 밤 논길의 물을 대라는 명령을 어긴 탓이다. 논 구덩이 쳐 박힌 김모는 그 길로 도망쳤고, 얼마 후 6.25가 터졌다. 이모부는 그 후 집을 떠나 동가식서가숙했다. 도망친 김모가 동네 동맹위원이 돼 고향에 나타났기 때문 이다.
9.28 수복으로 석 달만에 집에 돌아온 이모부는 그러나 바로 그날 밤 김모의 야습을 받고 담 너머로 도망치다 총에 맞아 횡사했다. 내가 사체를 보고 놀란 건 그 때가 처음이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주위에 식구가 없으면 혼자서 잠을 못 잤다. 그 날 새벽 이모부의 주검을 지켜보던 가죽나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모는 그 후 아내 있는 장교의 첩이 됐고, 자식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이모가 되뇌던 통곡을 지금껏 기억한다.
“언니는 좋겠네… 상을 치를 자식들이라도 있지 않소” 오열하던 이모가 하루만에 돌아가셨다. 언니의 주검 앞에서 함께. 새삼 50여년 전 악몽을 떠올림은 나의 가죽나무 환각이 아직껏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체는 이제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정작 무서운 건 인간이 인간한테 품는 증오, 소작인 김모가 이모부한테 품었던 그 증오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직시해 본다. 증오란 무엇인가. 650만의 유대인을 죽인 아돌프 히틀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14세 때 아버지를 잃고 생모 밑에서 크는데, 생모 클라라는 아버지와 22세나 나이 차가 있는 데다,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다. 그녀가 사촌오빠와 남녀관계를 맺은 것은 남자의 둘째 처가 병이 들어 죽기 직전으로, 둘 관계는 그런 의미에서 불륜관계였다. 히틀러는 이런 범죄 가운데 잉태된 아이였다. 히틀러와 어린 동생 그리고 앞서 두 명의 전처 소생들까지 떠 안은 클라라는 생계를 위해 유대인 남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영국인 알랜 벌록이 쓴 책 `히틀러와 스탈린`은 당시 히틀러가 태어난 비엔나라는 도시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비엔나에 불과 6,000여명밖에 살지 않던 유대인 수(도시의 2%)가 몇십 년 사이에 17만5여명(8.6%)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빚게 된다. 또 이들 유대인이 차지했던 도시 내의 신분과 목소리는 이 수치보다 훨씬 커, 도시 내의 가장 영향력 있고 유망 직종인 변호사, 정치인, 의사, 언론인, 은행가, 예술가의 직업을 거의 독식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히틀러가 나중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대인에 관해 언급한 “수천 수만의 순수 독일 피를 이어받은 소녀들이 이 역겨운 안짱다리 유대인 사생아들의 배 밑에 깔려 있는 악몽에 시달렸다”는 대목은 그 당시 유행하던 반 유대정서 그리고 생모 클라라를 통해 보고 느낀 유대인 혐오감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한때 그림에 그토록 소질을 보였던 소년 히틀러를 증오의 악령이 꿀꺽 삼켜버린 것이다.
수도원의 수사 출신 스탈린이 악령으로 바뀐 것도 예의 증오 탓이다. 그림에 능했던 나의 이모네 식구가 소작인 김모의 증오에 풍비박산됐듯이. 증오는 그토록 무섭다. 지금 파리에서 히트 치고 있는 역사학자 클로드 리브가 쓴 ‘나폴레옹의 범죄’(Le crime de Napoleon)라는 책은 노예봉기를 진압키 위해 흑인들을 몰살한 나폴레옹의 만행과 그 배경을 이루는 증오를 상술하고 있다. 더 가관은 1940년 6월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가 앵바리드 광장에서 ‘하일 나폴레옹!’(나폴레옹 만세!)이라 외치며 경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증오는 이처럼 대를 잇는다. 또 시대를 반영한다. 지금처럼 계층간, 세대간, 빈부간, 보혁간에는 물론 같은 직장 안에서마저 증오가 저토록 기승을 떠는 서울을 느낄 때마다 나는 7세 소년시절 봤던 예의 가죽나무가 떠오른다. 그토록 무섭고 떨리던 이모네 집 마당의 험상궂던 가죽나무가.
김승웅
한국 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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