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40 후반을 넘어가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당신, 요즘 문제가 많아요” 결혼 생활 20여 년 동안 별 잔소리가 없던 아내였다. 평소 이해심이 많아 웬만한 일은 눈감아 주던 아내가 갑자기 정색을 하고 던지는 한마디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내 문제를 잘 안다. 중년을 넘기며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미세한 부분까지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우선 무기력해지는 신체적 변화였다. 만성 피로감이랄까? 종일 직장 일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구운 오징어처럼 몸이 오그라들었다. 전구 하나를 갈려고 의자 위에만 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노화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반하던 이마에 갈매기가 두어 개 생기더니 상병 계급장처럼 붙어 떨어지지가 않는다. 느는 주름과 함께 머리도 빠지고 뱃살도 불어났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낭패였다.
그런데 이런 외형적 변화보다 훨씬 더 나를 외롭게 하는 것은 자신감의 상실이었다. 남편으로, 가장으로, 아버지로서의 자신감. 고백하건대 이런 경우다. 나는 완벽한 남편인 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 부부 모임에서 아내가 갑자기 행복한 삶이 무옌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보일 때. 중대한 가사 일을 결정하면서 아내 말을 묵살하고 가장의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가 나중에 참담한 실패로 끝났을 때. 아들이 대학으로 떠나면서, 이젠 아빠의 화난 얼굴 안 봐서 좋아요 농담반 진담반 던지곤 돌아설 때. 그때 느끼는 무력감 같은 것이었다.
생각하면, 젊은 날 나의 판단력은 항상 옳았다. 나는 가정의 선장으로 의욕과 희망의 깃발을 휘날리며 진두 지휘했다. 아이들 공부와 과외활동 뒷바라지도 전력투구했다. 그러면서도 새로 산 낡은 집 안팎까지 사흘이 멀다하고 갈고 닦았다. 아내는 모든 일에 책임지고 뛰는 내가 친정아버지 닮았다고 믿음직해 했다. 아이들도 아버지날 글짓기에서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분이 아빠라는 감동 어린 글로 상까지 탔다. 나는 슈퍼맨이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턴가 무릎도 마음도 시리더니 허수아비처럼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여보,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코고는 것이에요.” 전혀 뜻밖인 아내의 말이었다. 내가 고민하던 근본문제에서 한참 빗나가 있었다. 우선 좀 안심은 되었다. 그러나 코고는 일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상스럽게 코를 골다니. 학창시절에는 도사처럼 가슴에 손을 모으고 점쟎케 잔다고 칭찬까지 들었던 몸이었다. 자존심의 관한 문제였다.
“당신의 코고는 정도는 천둥번개에다 낙뢰까지 치는 형이에요. 엄청 소리가 큰데 두 옥타브를 왕복하면서 가끔 중간에 숨이 끊어져요. 놀라서 당신을 흔들어 깨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나를 건넌방으로 내쫓지 않을 걸 보면 그 정도는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수양회를 갔던 날, 나는 내 문제의 심각함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같은 방 룸메이트 다섯이 침구를 싸들고 달아난 것이었다.
울산에서 이비인후과를 하는 아래동서에게 전화를 했다. “행님, 수술 간단합니다. 빨리 나오이소” 화통한 전문의의 말을 들으니 적이 안심은 되었지만 당장 나갈 형편이 못되었다. “행님, 그럼 운동을 시작 하이소. 중년이 되면 목젖부위에 기름이 껴서 늘어납니다. 잠잘 때 그게 기도(氣道)를 막아 심한 코골이가 되지예” 좀더 놀라운 사실은 코골이는 숙면을 취하지 못해 뇌나 심장에 산소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서 항상 낮에도 졸리고 무기력증에 허덕인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로 가족들에게 유산소 운동을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무기력증의 원인이 밝혀진 이상 한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아내는 현미와 채소 등 건강식으로 식단을 싹 바꾸었다. 아이들은 밑창에 압축공기를 넣은 최첨단 운동화까지 사왔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힘들 때마다 수양회 때 도망간 룸메이트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반년쯤 고비를 넘어서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신이 나서 더 열심히 뛰었다. 가능하다면 날고도 싶었다. 그렇게 세월 가던 어느 날, 아내가 웃으며 말한다. “요즘 당신 코고는 소리가 덜해요. 그러니 오히려 잠이 안 와요. 청천 벽력같은 소리에 잠을 설치면서도 당신이 곁에 있구나하는 생각에 푸근했었는데.. 남편 코고는 소리가 자장가였을 줄이야. 나도 늙어 가나봐” 나는 그날 밤 다시 슈퍼맨이 되어 원색 삼각내의를 입고 금문교 위를 쌩쌩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