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한 일본인 친구가 내게 찾아 왔다. 이곳 산타모니카 사진협회에서 알게 된 친구다. 가을이 익었으니 시간을 만들어 ‘단풍사냥’을 같이 가자고 한다. 잘못 이해를 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질문을 했다. 단풍사냥이 맞는다고 한다.
“단풍구경이라고 하면 그만이지 무슨 단풍사냥이냐?”고 되물었다. 그 친구는 단풍사냥에 대해 설명을 한다. 가을이 되면 한 해의 수확이 끝나 마음의 여유로움이 생기고, 세속에 찌든 때를 산 속을 거닐면서 훌훌 털어 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예술에 감탄하고 예쁜 단풍잎도 기념으로 주어 올 수 있어 일본인들은 그렇게 표현한다고 했다. 그럴 것도 같았다.
대학 4학년 때다. 졸업여행으로 설악산에 처음으로 가 보았다. 설악산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은 이미 어두웠고 피곤하기도하여 지정해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설악산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절벽과 하늘 높이 솟은 바위에 소나무들이 운치 있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바위 봉우리들은 자욱하게 깔린 아침 안개 위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이 벅찼다. 동양적이고 멋진 풍경의 진수를 맛 본 것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넋을 잃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화강암으로 된 기암괴석들이 마치 빨간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현란했었다. 3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고향은 부산 영도다. 산이 둘러 쌓여있는 바닷가에서 성장했었다. 어릴 때부터 산행을 좋아했다. 바닷가며 산 속을 친구들과 돌아다니면서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피부로 느끼면서 자랐다. 가을이 되면 풍요롭던 초록빛 산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산이 온갖 색의 옷을 입는 착각에 빠졌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러면서 ‘가을이 되면 나뭇잎들이 이렇게 고운 색을 내다가 왜 떨어지는 것일까’하는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중학교 생물시간에 낙엽에 대한 궁금증이 완전하게 해갈되었다. 가을에 단풍이 드는 것은 나무들이 겨울맞이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가을에는 낮의 길이가 짧아진다. 이것을 나무의 내부 시계는 잎에 보내는 물과 영양소의 공급을 차단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 때부터 각 나뭇잎은 잎자루가 가지에 붙은 곳에 떨켜를 형성한다. 코르크 같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포층인 이 떨켜는 잎에서 나무의 나머지 부분으로 오가는 모든 순환을 차단하며 마침내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카로티노이드 색소의 영향으로 잎들은 노랑이나 주황 색상을 띠기 시작한다. 이 색소들은 여름 내내 잎에 들어 있지만, 엽록소의 녹색이 워낙 우세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것뿐이다. 반면, 빨간색은 주로 안토시안에서 나온다. 이 색소는 가을이 되어야 생산하게 된다. 가을에는 엽록소가 파기되면서 노란색과 빨간색 색소들이 주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엽록소가 전혀 남지 않게 되면서 미루나무의 잎은 샛노란 색이 되고 단풍나무의 잎은 새빨간 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자연을 바라보면, 단풍이 해마다 그리고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주로 그 지역이 낙엽수의 종류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 한가지 요인은 기후이다. 나뭇잎이 생산하는 안토시안의 양은 날씨에 크게 좌우한다. 낮에는 햇볕이 쨍쨍하고 밤이 서늘할 때에 나뭇잎은 안토시안을 가장 많이 생산할 수 있다. 극동 지방의 가을은 대개 이러한 조건에 알맞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둘 다 산이 많은 나라이다. 그 산에는 다양한 낙엽수로 뒤덮여 있어서 많은 단풍객들이 단풍을 구경하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다.
또 있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는 전체 과정은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실용적인 것이다. 나무는 스스로 잎을 없앰으로써 겨울 동안 수분과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이다. 여름 동안 잎에 축적된 독성 폐기물도 함께 제거하게 된다.
땅에 떨어진 그 많은 낙엽은 다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균류, 곤충류, 벌레와 땅속에 사는 그 밖의 동물들 덕분에, 유기물로 변한다. 변한 유기물은 얼마 안 있어 기름진 토양의 중요한 성분인 부식질로 다시 변한다. 눈부신 장관을 연출한 뒤 떨어진 그 잎들은 새로운 봄의 성장을 위해 비료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멋진 재활용 과정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며칠 전, 일본인 친구와 함께 일상을 잠시 멈추고 가까운 세도나로 향했다. 가을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래도 산곡의 맑은 냄새와 낙엽이 황금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을 보았다. 다람쥐가 뛰놀며 산새들이 노래하는 곳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을 한 것이다. 이 멋을 무엇으로 설명하랴! 흐르는 계곡에 발을 담갔다. 발이 아프도록 시리다. 싸르락 소리를 내고 바람에 구루는 낙엽을 보면서 ‘구르몽’의 시를 읊어 보았다.
물줄기를 따라 인적이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나뭇잎 속에 간직한 채 숨겨 있는 형형색색의 깊은 맛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나무들 사이로 휘감고 지나가는 청명한 바람소리마저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돌아 올 때는 예쁜 단풍 몇 잎도 사냥했고, 추억이 담긴 필름 몇 통도 카메라 가방에 들어 있었다.
강정실
약 력
수필시대로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청하문학 회원
재미사진협회·서북미 사진작가협회·산타모니카 사진작가협회 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