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신드롬은 기자출신 작가 김훈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준 `칼의 노래`로 불타기 시작한다. 이 신드롬은 이 책을 탐독한 노무현 대통령의 독후감, 또 이를 `불멸의 영웅`으로 영상화한 방송사의 노력으로 지난 1년 남짓 서울 시민 모두를 이순신으로 만들었다.
나 역시 한국일보 옛 친구 김훈의 책에 미쳤다. 이순신의 영혼 속에 뛰어들어 장군의 핏방울을 잉크 삼아 한자 두자 쥐어 짜낸 김훈의 글은 이 시대 어느 문객도 엄두를 못 낼 쾌거였음이 분명했다. 허나 나는 여기에 삼가 덧글 하나를 보태고 싶다. 임진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재조명이 그것이다. 언뜻 포 깨는 쓴 소리로 들릴지 모르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지금의 우리에겐 전투보다 전쟁을 논함이 순서이며, 지금 이순신 신드롬이 한풀 가신 판이라 덧글을 쓸 적기라 여기기 때문이다.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일본의 속담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강적 모리(毛利)를 토벌하기 위해 교토의 절 혼노지에 숙박했다가 자신이 아끼던 부장 아케치 미츠히데(明知光秀)에게 피살된 사건으로, 진짜 적은 엉뚱한 데 있다는 의미다. 불의의 타격을 입었을 때 일본인들이 지금도 자주 쓰는 말이다.
이 혼노지의 변(變)이 바로 임진왜란의 단초다. 이 사건으로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던들 임진왜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혼노지의 변이 터질 당시 노부나가의 또 다른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역시 모리와 대치 중이었다. 하시바는 주군 노부나가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자 적장 모리와 전격 화의를 맺고 회군해 버린다. 이어 노부나가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후사 결정에서부터 장례식까지를 자신의 주도하에 치르게 된다. 이 하시바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다. 도요토미라는 성은 전국시대를 수습 후 그가 천황에게 하사 받은 성이다.
도요토미는 그러나 영주격인 다이묘(大名) 출신이 아닌 자수성가했던 인물이므로 강력하고도 믿을 만한 직할 군이 없었기에 조선침략을 자신의 직할군 편성의 기회로 여긴다. 이 모든 과정 절차가 알고 보면 모두 혼노지의 변이 초래한 업이다.
여기서 새삼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요토미가 당시 바깥 세상을 내다보던 국제적 안목의 수준이다. 조선침공 한해 전 그는 포르투갈 영토인 인도 고어 총독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임란이 한창 진행중인 1593년에도 필리핀의 루손 도(島)와 타이완에도 같은 조공을 요구, 불응할 경우 군사적으로 정복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탁월했다.
임란시 또 하나 무시 못할 사실은 당시 왜군에게 기본화기로 지급된 조총의 위력이다.
이 위력이 사실보다 과소 평가돼 나는 늘 불만이다. 임란이 발생하기 50년 전 포르투갈로부터 전해진 조총은 그 후 개발이 거듭돼 오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시킨 결정적 무기가 됐다.
특히 나가시노 싸움(1575년)과 세키하라(關原) 싸움(1600)은 조총을 가진 보병부대가 활이나 칼, 창 등을 지닌 기존의 사무라이 기병대를 깨부순 역사적인 전쟁으로, 임진·정유 양란은 그런 의미에서 왜측에는 조총의 위력을 재확인하는 전쟁이었다.
당시 진주성이나 행주대첩 등 지엽적인 승리만을 들어 임란 전체를 우리에게 유리했던 전황으로 호도함은 올바른 역사교육이 못된다. 진 싸움은 진 것으로, 대신 싸움에 진 이유를 정확히 알려줌이 옳다. 이순신의 활약 또한 바로 이 대목에서 재조명 받아야 정석이다.
그의 등장으로 왜군의 해상활동이 완전 봉쇄됐고 도요토미가 직접 조선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던 계획도 취소됐다. 왜군들은 또 전라도 땅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이순신의 전과를 지금처럼 해상에서 거둔 몇 차례의 대첩으로 국한하는 것도 옳은 평가가 아니다. 그는 국제상황을 내다 본 도요토미처럼, 전황을 볼 줄 아는 지장이었다.
새삼 글의 화두로 일본을 올림은 그 취지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APEC 정상회담이 마무리된 지난 19일이 정확히 100년 전 을사보호늑약이 체결된 바로 그날이기 때문이다.
회담이 폐막된 오후 3시는 하필이면 을사늑약이 서명된 시간과도 일치한다. 이번 회담에서 시종일관 내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주시했던 건 그래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전황 파악이 살길이다. 전황은 바로 국제감각이다.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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