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 목사’임락경씨
강원도서 농사 지으며 ‘선교원’교회
“장애인과 지내기 위해 목사됐어요”
유기농·건강 책 인기… 강의차 방미
강원도 산골에서 무공해 농사 짓고, 양봉하고, 수맥 찾고, 환경운동하면서 장애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특이한 이력의 목사를 만났다. ‘시골교회’ 담임이라는 임락경 목사. 꼬질꼬질한 한복 차림에 얼굴 가득히 주름잡으며 건네주는 명함을 보니 얇은 종잇장이다. 그냥 종이에 이름 석자와 연락처를 복사해 가위로 오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촌놈 임락경/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우)209-830/ (033)441-4298/1149’
하긴 시골에서 농사짓는 목사니 명함 쓸 일도 별로 없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건 또 아니다. 유기농과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대한민국을 휩쓸면서 요 몇 년새 그는 소위 ‘뜨는’ 목사가 됐다.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방송에 나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임락경의 건강교실’ 팬이 많아지면서 엄청 바빠졌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농사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얼굴이 촌스럽고 소탈하다.
미국에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베이커스필드 두레마을에서의 ‘몸 비우기’ 강의차 나들이한 임목사와 마주앉아 한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존대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것이, 자기 하고 싶은대로 그냥 이어나가는 말투 그대로 옮긴다.
“나는 원래 농부야. 농사꾼은 몇가지 자격을 갖춰야하는데 지게 질 줄 알아야하고, 새끼 꼴줄 알아야 하고, 멍석 만들줄 알아야 하고, 용마루 틀줄 알아야 하고, 쟁기질 할줄 알아야돼. 왜 목사가 됐냐구? 장애인들 데리고 사는데 복지시설로 인가받지 못하면 불법이 돼버려. 그런데 교회에서 선교사역으로 하는 것은 괜찮다고 해서 목사 된거야”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 목사 되느라 신학교에 다녔지만 정부인가 없는 군소 신학교 출신이라 대졸자 명단에도 들지 못한다. 12세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출가, ‘동광원’으로 들어갔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병자, 과부, 고아, 장애인들을 위해 세운 동광원에서 결핵환자들과 살면서 행동하는 신앙을 사숙한 그는 성인이 되어서는 농민운동을 하다가 정보부에 끌려가 유신 반대한다고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 그리고는 80년대 초부터 산골에 집을 짓고 정신 장애인들과 지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 한국사회 밑바닥을 몸으로 겪은 임목사의 통찰은 이렇다.
“일제시대에는 나병이 많았고 전후 1950~60년대에는 결핵환자가 많았어. 이 병들은 못 먹어서 생긴 병들인데 70년대 들어서면서는 없어졌지. 대신 80년대부터 뇌성마비와 정신박약 장애인들이 갑자기 많아졌는데 다 환경문제 때문이야. 장애의 70%는 음식에서 오는건데 가공식품하고 고기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래”
임목사에 따르면 호랑이 사자처럼 송곳니만 있는 동물은 평생 육식을 하고, 기린 사슴처럼 송곳니가 없는 동물은 초식만 해야 한다. 사람은 32개 치아 중에서 4개의 송곳니를 갖고 있으므로 32분의 4, 즉 8분의 1만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한번도 많다는 것이 임 목사의 주장이다.
시골교회에서 함께 사는 ‘선교원’은 25~30명. 그중 장애인이 몇 명이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또 머쓱하다. “누가 장애인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아. 내가 장애인이지 뭐. 정신병자니까 이런 일 하고 사는거 아닌가? 그리고 같이 살다보면 장애인들은 별탈 없는데 봉사자들, 건강한 사람들이 훨씬 더 사고 많이 쳐요”
교회 주위 밭에서 무공해로 채소를 기르고 양봉을 하며 닭, 돼지 가축을 키운다. 가내 공업으로 재래식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내다 파는데 그걸로 생활비의 반 정도가 충당되고, 나머지 반은 친구나 후원자들이 보태준다고 한다.
거기서 그렇게 농사지으며 장애자들 데리고 살아온 세월이 25년. 어느 시대에는 그것이 미친 짓이었고, 어느 시대에는 기피 대상이었으며, 또 어떤 시대에는 별 주목도 끌지 못한 삶이었는데 갑자기 2000년대 들어 떠들썩해진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사실 이렇게 빨리 유기농이 확산될 줄 기대 못했어. 내 평생 안 될거라 생각했지. 그래도 외롭게 하고 있었는데… 70년대 박정희의 쌀 증산정책에 안 따르고 정부 탄압 받으며 고집스럽게 재래농사법을 고집하던 농부들이 지금은 다 환경농업의 선구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잘 된거지”
임 목사는 목사들이 선비정신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은 그 옛날 마을 공동체의 개념을 회복해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옛날에 우리나라엔 선비가 있고 양반이 있었잖아. 양반은 돈 있고 세력 있었지만 선비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을의 총지도자였어. 동네 사람들 궁합 봐주고, 애 낳으면 이름 지어주고, 침도 놔주고, 약도 가르치고, 산소자리 봐주고, 제사때 지방 써주고, 날씨도 봤지. 동네의 모든 문제를 총망라해서 봐주는 사람이 선비였어, 서양사람들 복지제도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들 하지만 우리 선비들은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궁합부터 봐주고 죽고나서는 제사까지 책임졌어. 목사들이 이런 선비정신을 회복하고,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거지나 바보도 다 한 마을에 살았던 공동체 정신이 살아나야 우리나라가 살아”
임목사는 책도 두권 썼다. 2000년 나온 ‘돌파리 잔소리’는 건강한 삶의 필독서처럼 읽히고 있고, 올해 나온 ‘그 시절 그 노래 그 사연’은 자서전 겸 우리노래의 역사가 담긴 특별한 책이다. 그의 회갑연과 더불어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복지부장관이 참석했을 정도로 그의 삶과 그의 소리는 이제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농사만 짓던 사람의 책이 어떻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다들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나는 말이 안되게 말하고 글쓰니까 좋아들 하대”
북한강유기농업운동연합 초대의장, 정농회 이사, 상지대학 친환경농업 교수이기도 한 임락경 목사는 14~18일 몸 비우기 강의를 마친 후 20일 오전 11시 두레마을에서 설교하고, 29일 오후 6시30분 미주감리교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며, 12월4일 하나교회(담임 강성도 목사) 주일예배에서 설교한다. 그외 북가주와 시카고, 위스콘신, 동부 지역을 두루 돌아본 뒤 12월 중순 귀국할 예정이다.
<글 정숙희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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