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은(간호사, 국제 펜 회원)
얼마나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렀던가. 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을 만나는 곳. 전자동이 되 버린 순간 판단과 24시간 마라톤이 계속되는 곳. 슬픔과 기쁨이 늘 공존하고 삶의 추는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 참 오랫동안, 숨막히게 뛰어 다녔다.
점점 일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은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콜로라도 주가 간호사들을 보호하는 정책이나 힘을 합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노동조합이 결성돼 있지 않아 필요 이상의 센티멘탈과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는 내 나이가 드는 것에 비례한 환자의 체중이라든지 기구의 무게 등등, 물리적인 힘의 역부족이었지만. 거기에 덧붙어 심리적인 상실감도 커다란 한몫을 했다.
달포 전, 성당에서 가깝게 지내던 형제 님이 교통사고로 중환자 실에 들어왔고 그분을 간호하면서 느꼈던 나의 무력감.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상태의 형제님은 중환자실에서 열흘쯤 머물다 재활 병동으로 옮겨가셨다. 신도 아니면서 신을 닮은 놀음에 너무 탐닉되어 있었던 것 은 아닌가 자성해 보는 시간이었다. 인력과 의학으로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환자 실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은, 아니 나는 뭐든지 고칠 수 있는 양, 뛰어다녔다.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신의 계획에 의해 그 형제님은 그렇게 일을 놓고 쉴 운명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시간에 떠나도록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그런 그분의 계획들을 알지 못한 채 뭐라도 할 수 있는 양 자만했던 것 같다.
결론이 여기에 이르자 무력감과 자괴감 은 점점 더해갔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아직 명퇴나 조퇴를 하기에는 이 르고, 물리적인 힘을 덜 드리며 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없는지 살피게 되었다. 기 왕 자리를 옮길 것이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자리면 좋겠고 한발 더 나가서 한국 커뮤니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
또다시 내게 열릴 새 문이 있을지 잘 몰랐지만 두드려 보기로 하였다 . 중환자실의 오랜 경험을 높이 사준 지난주의 인터뷰. 10명의 패널 앞에서 그래 도 내 의견을 충분히 말했나보다, 다음 주부터 자릴 옮긴다. 이름하여 케이스 매 니저. 내게 새롭게 맡겨진 임무는 병동 환자들의 상태를 일일이 살피고 입원에서 부터 퇴원까지 말 그대로 매니지먼트를 해 주는 것이다. 병상에서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간호에서 떠나 환자 전체를 큰 그림으로 보는 것. 또한 일반 간호사의 어려운 점을 챙기고 환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이나, 보호자들의 어려운 점 , 보험관계, 여러 의사들과의 상호협조는 물론 환자들의 퇴원 후 발생될 수 있는 문제점까지를 미리 챙겨 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환자 하나 하나에게 전인간호를 제공 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지금까지 받았던 시간당의 임금 에서 연봉제로 월급의 모양새가 달라졌으며 병원에서 만들어 주는 명함도 얻어 받 았다. 당분간 트레이닝이 되겠지만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물리적인 힘보다는 나 의 사고와 판단, 매니지먼트라는 능력과 힘을 요구하는 자리는 또 하나의 도전이 되어 내게 다가든다. 이 새로운 개념의 자리는 반은 간호사로 반은 사회사업가로 있을 때 그 모양새를 갖춘다. 지역사회 자원을 찾고 정부의 혜택도 잘 살펴보고 퇴원 후의 팔로 업이 잘되어야만 또 다시 입원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개념과 사회적 자원들을 한국 커뮤니티에도 충분히 홍보하여 지 역사회 곳곳에서 잠자고 있는 리쏘스들을 십분 이용해 볼 모양이다.
잘 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걱 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련다. 노력하는 모습으로 초 심을 잃지 않고 가다보면 나의 가장 큰 약점이여 장점이 될 수 있는 마이너리티로 서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잘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젯밤 꿈엔 푸른 바다를 보았다. 뱃머리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며 그렇게 펼쳐 나가보리라. 바다엔 파도가 일고 때론 바람도 불겠지만 단단히 키를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으면 출렁거리는 파도를 타고 흰 포말을 일구며 멀리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꿈에선 깬 머리맡엔 갯내가 가득 피었다. 그것을 찾아 한발 성큼 내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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